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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yunice
작성일 2014-02-04 (화)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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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의 친필 애국가


                                                          윤치호의 친필 애국가
                                                         민석홍 정리2014.01.31.

                          애국가 작사자인 윤치호선생의 친필본이 에모리대학에 보관된 경위.
-‘문화재 제자리 찾기’의 혜문 스님과 안민석 의원, 김준혁 교수가 애국가 친필본을 열람하기 위해서 2014년1월31일 에모리대학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1.    윤치호 선생이 1907년에 한국최초로 애국가를 넣어서 ‘찬미가’를 譯術(번역과 저술) 발행하였음. (유첨1. 찬미가 표지와 애국가Patriot Anthem/ Tune Auld Lang Syne)
             
 
2.    이 ‘찬미가’는 윤치호선생이 개성에 한영서원을 개교하면서 학생들이 부르게 하기위하여 발간한 책임. 원래 애국가는 찬송가로 작사한 것이므로 4절로 되어 있음.

3.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08년에 대성학교를 설립하면서 윤치호선생을 초대교장으로 모셔갔으며 윤치호선생은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애국가가 포함된 이 ‘찬미가’를 부르게 한것이 분명함.

4.    안창호선생은 1910년에 합방이 되자 샌프란시스코 로 망명해서 교민지 ‘신한민보’ 를 박용만과 함께 발간하면서 1910년9월21일자에 윤티호작 ‘국민가 로 명시 했음. (유첨2참조)  
                     

국가상징연구회 학술 세미나(1998년2월13일)에서 안창호 작사설을 발표한 독립기념관 이명화 연구원은 말하기를 “안창호가 발간한 신한민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윤치호가 그의 작품으로 이름을 실어 국민가를 게재 했다기 보다는 안창호가 윤치호를 앞세워 미주사회에도 애국가를 보급하려했던 것으로 추정해본다.”라고 답변한것이 전부이다.
 
유첨2 ▲ 혜문 스님이 이끄는 시민단체인 '문화재 제자리 찾기'는 애국가 가사의 최초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2014-01-22

5.    일본검찰은 윤치호를 105인사건의 주모자로 재판하면서 그를 애국가 작사자로 기소문에 명시 했음.(일본정부의 외교부 문서 보관실)

6.    1945년 해방이 되자 윤치호의 셋째 딸 문희씨(남편은 정광현 전서울대학교 법대교수,서울대학 도서관장)의 요청으로 애국가를 직접 써서 따님에게 준것임.  

7.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최남선)에서 애국가 작사자 규명회의가 열렸을때 안창호, 민영환, 최병헌, 김인식, 윤치호등이 제출한 자료를 검증한결과 윤치호가 가장 객관적이었고 확실하다는 의견(11대2)이었으나 만장일치가 아니므로 결정할수 없다는 주요한 씨의 반대로 작사자 미상(未詳)인채로 오늘에 이르렀음.

8.    이 회의때 1945년에 쓴 윤치호의 친필 애국가를 증거로 제출했는데 필적은 맞으나 먹물을 감정한결과 오래된(1907년)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채택되지 못했음.

9.    1955년 심의할당시 1907년에 발간된 윤치호 역술 ‘찬미가’와 안창호가 발간한 1910년9월21일자 신한민보에 실린 윤티호작 ‘국민가’를 추가로 제출 했었더라면 바로 공인을 받을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있음.

10.    윤치호선생을 친일파로 몰아세우는 상황이어서 그 친필본 애국가는 미국에 사는 외손자 정태웅 씨 (정광현교수 큰아들)가 보관하고 있다가 대한민국이 윤치호선생을 애국가 작사자로 공인 하면 그때 독립기념관에 돌려주기로 하고 1990년에 윤치호의 모교인 에모리 대학에 맡겼음.

11.    1996년에 그의 후손인 윤경남과 외손자 정태진박사(정광현교수 둘째아들)가   에모리 대학을 방문하여 애국가 친필본 애국가와 그의 60년에 걸친 일기 원본을 열람했음.

유첨 3사진:1996년 에모리대학 방문시 왼쪽부터 정마리아(정태진 박사부인, Chase 총장,Yunice윤경남,외국문서과장

12.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선생으로 밝혀지더라도 친일파가 작사한것을 부를수 없으니 차제에 바꾸자는 주장도 없지 않았음. 윤치호선생은 이미 70년전에 현 사태를 예견했다. 해방 직후에, 김활란 총장이 어려운 시기에 이화여전을 지켜준 좌옹의 공로에 감사하려고 개성 자택을 방문하자,애국가를 윤치호가 작사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당부하시기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지금 죄익 세력들이 나를 미워하고 있는데 애국가 마저 없어질수 있으니 삼가 하시오.”라고, 솔로몬의 재판을 연상하는 말씀을 하셨음.

13.    윤치호 선생은 작사자임을 밝히는 자료가 많은 반면 안창호 선생측(흥사단)  에서는 그 분이 열렬한 독립운동가 였던점을 강조하는 증언과 정황설명만 있을뿐 아무런 근거 자료가 없음.

14.    국가 상징위원회 연구원인 서지학자 김연갑선생이 애국가 작사자에 관한  자료와 연구논문이 많다.
최근 논문:  “안창호도 잘알았다.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했다는역사적 사실” [2014-02-02] 뉴시스      

2014.1.24
정리: 토론토에서 友史 閔 碩 泓

추신: 문화재 제자리 찾기의 혜문스님, 민주당 안민석의원, 경희대 김준혁교수 가 2014년 1월31일에 에모리대학을 방문하여 윤치호 친필본 애국가와 일기 원본을 열람하였다. 혜문스님(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은 “이 문서는 애국가가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1907년이 아니라 1945년 10월 작성되었지만 일단 유력한 작사자가 스스로 밝힌 문서라는 점에서 애국가 작사가 규명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사료적 가치를 평가했다.   (참조: ‘미 에모리대학 윤치호 친필본 애국가 최초공개’ 뉴시스 2014.2.1)

윤치호의 찬미가
*    윤치호는 한국인 최초로 1887년 상해에서 남감리교 세례교인이 되었다.
*    1888년부터 1893년까지 미국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면서 문학,역사, 정치학, 철학을 공부 했다.특히 어학에 능통하여 언제나 학생대표 토론역활을 맡았다.
*    미국 유학시절에 무디의 부흥운동과 복음찬송에 감동을 받고 조선의 복음화를 결심했다.
*    남감리교가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도록 캔들러 감독에게 선교기금을 맡겼으며(1893년) 최초의 남감리교 선교사 Reid 를 도와서         상해에서 많은 찬송가 번역작업을 함께했다.(1894년부터)
*    윤치호는 10년간의 유학을 마친후에 목사안수를 받기 보다는 정치에 참여하면서 사회개혁과 동시에 선교의 사명을 다짐하면서           귀국했다.(1895년)
*    하디선교사와는 평생을 함께 동역한 친구로서 하디가 1907년평양대부흥회를 주도할때 한글 ‘찬미가’를 발행하여 적극 지원 한것         으로 보임.
*    1905년 을사조약이 강행되자 각료직을 사임하고 선교와 교육사업에 주력하고 나라사랑을 강조하면서 1907년 한영서원을 개교하         였는데 학생들에게 부르게 할 목적으로 ‘찬미가’를 역술한것으로 보임.
*    복음찬송에 익숙한 윤치호는 애국가를 찬송가 형식으로 4절까지 쓰고 후렴을 넣어서 작사 하였음. 교회와 학교에서 애국심을 고         취시켜려 했음.
*    國歌에 4절과 후렴이 있는 나라는 오로지 한국의 ‘애국가’뿐이다.
*    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에 조선대표로 참가하여 토착교회의 역활에 대하여 연설했는데 미국과 영국의 대표들에게 큰 감동(충          격?)을 주었다. 선교사들이 전해주는 외국 찬송가 만이 아닌 조선의 애국가를 찬미가에 포함시킨뜻을 간접적으로 피력한듯함.
       망명지에서 안창호 선생이 열열히 부른 애국가
*    안창호선생은 1910년에 합방이 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여 교민들에게 모든 행사를 시작할때 마다 부르게하여 애국심을 고취 시켰          다. 신한민보에 윤티호작 국민가를 소개 하였다.(유첨)
*    태극기와 애국가는 나라의 상징이 되었으며 안창호선생이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출범식에서도 애국가를 불렀다.
*    안창호선생이 1910년부터 1932년 까지 망명지인 미국과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애국가를 부르게 하여 애국과 국권회복의          정신을 일깨웠다
*    흥사단측은 김연갑선생의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다”라는 논문과 2012.9.3일자 뉴시스의 신동립기자가 ‘안창호 작사설’을 반박          한 글에 대하여 증거를 제시하여 반론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반응이 없다.
*    도산 안창호선생의 숭고한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며 그분의 명예를 위해서도 기념사업회나 유족들이 구전되는 증언만을 주장할것       이 아니라 구체적 근거 자료를 제출하여 공정한 검증을 받은후 국사편찬위원회로 하여금 작사자를 공인하는 일에 협조하기를 바  란다.

      일제의 억압과 처벌받으면서도 은밀하게 지킨 국내 애국가
*    1907년 윤치호 작 애국가는 찬미가에 실려서 한국교회와 윤치호선생이 한영서원을 개교하면서 교재로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    1914년 윤치호가 대구감옥에 수감중일때 한영서원의 이상춘, 신영순외 4명의 교사원들이 윤치호의 애국가를 포함한 음악교본             (1914년에 44책,1915년에 99책)을 인쇄하여 한영서원과 호수돈 여학교 학생들에게 배부한것이 발각되어 소위 불온문서 건으로 재       판을 받았다.(유첨4: 기소문, 자료제공 윤춘병 감독)
 
유첨4: 1915년  이상춘과 신영순 재판기록       유첨5: 1934년 유흥옥이 공술한 윤치호작 애국가
*    20년이 지난1934년에 이상춘교사의 부인 劉興玉 여인이 일본 검찰에 불려가서 금지된 윤치호의 애국가를 부르게 됐는지에 대하         여 조사를 받을때, 그 여인은 애국가를 유첨한 대로 공술하였다.(유첨5: 공술서, 자료제공 윤춘병 감독).한영서원의 음악교본은 이       미 압수된 이후 발간이 금지되었으며 복사기도 없었던 시절이었는데 유흥옥 여인이 애국가를 외워서 정확하게 쓸수 있었던것은          지하에서 꾸준하게 불러왔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    안창호 선생이 망명중인 3.1 운동때에 조선을 지키고 있던 남녀노소들은  박해를 무릅쓰고 애국가를 불렀다.
*    안창호선생이 망명지에서 애국가를 제일 많이 부른 공로가 있었다고 해서 작사자라고 할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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