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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yunice
작성일 2015-06-24 (수)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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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옹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 친필 원본과 보존경위

                                                좌옹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 친필 원본과 보존경위
                                                   정태진(전 보스턴 세톤 메디칼센터 원장:
                                       윤치호선생님의 외손자, 정광현-윤문희의 아들-편집자 주)1997


                                             Rose of Sharon of James Garden/ photo by Yunice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많은 소수민족들이 제국주의의 고난에서 해방된 날이 1945년 8월 15일이었다. 약 한 달 전부터 모든 국민학교와 중학교가 영구 휴교에 들어가 있어서, 국민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동네 친구들과 마냥 뛰어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중대방송이 있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라디오 앞에 모여들었다. 그때,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다는 성명이 들려왔고, 이와 동시에 터져나온 함성은 어린 마음에도 무엇인가 좋은 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의 어머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선가 태극기를 찾아내어 흔들면서 대문에 내다 거셨다. 큰길로 뛰어나가 보았더니 동네 사람들이 길에서 소리지르며 즐겁게 뛰어다니고 있었고, 대부분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그 태극기들은 그때 그려 만든 것이 아니라 그 동안 감추어 두었던 것을 들고 나온 것이 분명했다. 태극기를 손에 든 사람들은 또한 애국가를 힘차게 부르고 있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하면서.

 나는 이와 비슷한 상황을 몇 해 후 한국전쟁 때 또 한번 보았다. 국군이 북한의 평양까지 진군했을 때, 가는 곳마다 북한의 민중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뛰어 나와 애국가를 힘차게 부르며 환성을 올렸던 장면들이다.
 나의 외조부인 좌옹 윤치호 선생은 1800년대 말에 미국의 밴더빌트 대학과 에모리 대학에 유학하셨고, 여러 차례 세계 각지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그러나 36년간의 일본 압제 시대에는 우리 나라 땅을 떠나지 않고 지켜 왔 다.
  좌옹은 그의 망명생활 중에 민족에 대한 사랑과 서양 문명에 눈을 뜨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개화해야만 이 세계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나라에 대한 사랑, 임금에 대한 충성, 하느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그분의 뜻을 일찍 실감한 선각자로서의 모습을 그의 ‘찬미가’를 통해서 알 수가 있다.
15편으로 된 이 찬미가는 여러 해에 걸쳐 지은 듯하며, 1908년 경에 재판이 출간되어 우리 나라 초대 교회에서 처음으로 예배 시간에 찬송가로 부르기 시작했다.

 조국이 해방되었을 때 좌옹은 개성 북촌에 있는 송악산 별장에 은거하고 계셨다. 좌옹의 3번째 따님인 나의 어머님(윤문희)은 송악산 별장에 계신 친정아버님을 찾아가, 그분이 작사하신 애국가를 친필로 써 주십사고 청했다.
좌옹은 얼굴에 기쁜 빛을 나타내며, “그래? 내가 당장 써주지” 하고는 서재로 들어가 따님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애국가 전문을 묵필로 친히 써 주셨다.

 어머님은 그 친필 애국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작부터 이 애국가 친필을 받고 싶었단다. 그러나 그럴 엄두도 내지 못했지.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고 알려지면, 일본 경찰이 얼마나 더 괴롭혔겠니? 어린 조카들까지 일본 형사 놈들의 감시가 붙어 다녔는데 말이다.”

 이 애국가 친필 원본은 그 후 1955년 문교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작사자 규명시국사편찬위원회에서 11:2 로 윤치호작으로 결정하려고 했으나 만장일치가 아니어서 유보되었을 때,   나의 선친인 정광현 교수가 진정서에 유첨했던 증거품이다. (정광현 교수의 ‘애국가작사자에 관한 의견서’참조)
 그나마 그 원본도 어려운 경로를 거쳐 되돌려 받게 된 나의 어머님은,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리라는 신념을 가지고 이 친필 원본의 영구적인 보호 및 보관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옷장 속 깊이 감추어 두었다.

 그런데 1968년에 미국 Providence에서 둘째 아들인 내가 결혼했을 때, 어머님은 며느리에게 한복 몇 벌을 선물로 보내셨다. 한복 틈엔 놀랍게도 그 애국가 친필 원본이 들어 있었다.
내 아내가 된 박요수아 목사의 딸 마리아는 시어머님이 주신 가보로 알고 잘 간직했다.
 며칠 후 서울에서 어머님이 급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전화를 하셨다. 혹시 그 애국가 친필 원본이 선물 짐 속에 들어 있었는지, 그것을 평범한 종이로 알고 버리진 않았는지 크게 걱정하셨는데, 며느리가 그것을 귀하게 잘 간직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안도의 숨을 쉬셨다.

 그 후 아버님이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직을 은퇴하시고, 부모님은 미국으로 이민하여 큰아들 태웅과 함께 지내실 때, 거실 벽에 애국가 친필 원본을 예쁘게 표구한 액자를 걸어 놓고 마음 놓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애국가 친필 원본을 한국에서 보존하는 방법을 여러 군데에서 권해 왔지만, 작사자가 미상으로 되어 있는 한, 보존의 불안과 보관의 무의미 때문에, 부모님이 작고하신 다음엔 태웅 형이 은행 금고에 안전 보관해 놓고 있었다.
 어머님은 자신의 생명같이 아끼시고 친정 아버님의 사랑의 상징으로 지니고 있던 이 애국가 원본을, 좌옹이 망명 시절에 공부했던 미국 Georgia주의Emory 대학 도서관에 보내어 좌옹의 영문 일기 원본 45권과 함께 보관했으면 하셨다. 그러나 Emory 대학방문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하늘나라에 가셨다.

마침내 1996년 9월에 어머님의 소원이었던 Emory 대학을 방문할 기회가 왔다. 서울에서 외종매인 윤경남 (좌옹의 종손녀) 부부가, 한국 주재 미국 대사이며 Emory 대학 총장을 지낸 Laney박사에게 부탁하여, 현재 총장 William Chace박사의 초청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 내외와 동생 경남 셋이서 Emory University (New Emory)와 Oxford College (Old Emory)의 campus를 감명 깊게 두루 답사했다.

 

좌;에모리대학에 보관중인 윤치호 애국가 친필원본
우;애국가 친필 뒷면에 어머니 윤문희씨가 이서한 글씨(1945년9월에 아버지가 친희 주신것. 문희)

 총장과 반가운 인사와 이야기를 나눈 다음 Oxford 대학 학장의 안내로 좌옹이 공부했던 교실과 실험실, 도서관과 통나무로 지은 학장사택까지 구경을 했다. 도서관 진열장에는 좌옹의 에모리 시절 사진들이 여러 장 걸려 있어서, 좌옹을 다시 뵌 듯 반가웠는데, 그 사진은 그곳에 103년간 걸려 있었고, 좌옹의 가족이 100년만에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한 셈이었다.

 오후에는 지성적이고 아름다운 여성 도서관장인 Linda M. Matthews박사를 그의 도서관에서 만나 애국가 친필 원본 보관에 대한 의논을 했다.
 에모리 대학이 창립 200주년을 맞았을 때, 이 애국가 친필 원본을 학교에 기증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보관 문제 때문에 의논하던 중 몇 가지 조건하에 좌옹의 모교에 맡기기로 합의를 했다. 즉, 한국 정부에서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임을 공식 발표하고, 국가에서 보관하겠다는 것이 결정되면, 정태웅 형제의 동의 하에 한국에 이양한다는 약속이었다.
 
 1997년 4월 12일, 윤문희 여사의 큰아들 태웅이 그 애국가 친필 원본을 에모리 대학의 The Robert W. Woodruff Library의 특별 소장품으로 직접 들고 가서 맡겼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에모리 대학이 만든 윤치호 기념재단에 1만 달러를 장학금으로 기증했다.
 이것은 한국학 연구 혹은 윤치호 연구를 하는 유학생들을 위한 것이었다. 특히 좌옹이 설립한 한영서원의 후신인 송도고등학교 출신의 유학생은 특별히 고려하겠다는 계약까지 했고, 이 결과를 송도학원 이사인 좌옹의 손자 윤승구 씨에게도 알렸다.
 우리는 남다른 감회를 안고 좌옹이 거닐던 에모리 대학 잔디밭을 거닐었다 사람들에게서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그분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40년 전의 한 일화가 떠올랐다.

 나는 서울대학교 의대 2년 재학 시절에 강원도 지방의 무의촌을 3주간 순회 진료한 적이 있었다. 진료 중에 약품이 떨어져 친구 최학용과 함께 춘천에 갔다가, 그곳에 사는 그의 누님(춘천중학교 교감 부인)댁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우리는 그 집안의 가장 어른이신 최군 누님의 시부님께 큰 절을 올리고 웃목에 앉아 저녁밥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어른은 내게 부모님이 누구신지 묻자,
최군이 부모님을 소개하고 윤치호 씨의 외손자라고 말하자, 그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아랫목으로 끌어 앉히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어른은, 운동을 즐기는 분으로 당수를 잘하셨다. 일제 말기에 시국에 대한 절망감이 생기면 늘 좌옹의 강연회를 따라 다녔다. 인사도 나누지 않고 먼발치에서 그분을 사모하고 존경했다는 것이다. 조국 해방 1년 전에 서울 시청 근처의 강당에서 좌옹의 강연회에 참석했는데, 좌옹은 어딘가 몹시 초조한 태도로 젊은 학생들과 청중들에게 “절대로 격분하지 말고 제발 벙어리가 되라”는 말씀에 어떤 암시 같은 느낌을 받았다. 머지않아 일본이 패망할 것을 예견하고, 일본의 최후 발악에 희생되지 않도록 당부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강연이 끝난 후, 일본 경찰의 태도를 걱정하여 좌옹을 지켜보기로 했다. 좌옹은 단 한 명의 신변 보호자나 동행도 없이 홀로 전동 자택으로 힘없이 걸어가고 계셨다. 그래서 그 어른은 그날부터 좌옹의 자택 대문 앞에서 기다려 서 있다가 부탁하지도 않은 보호자 역할을 기쁘게 했다.
 해방 후 좌옹은 개성으로 가셨기 때문에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언젠가 그분의 가족이라도 만나게 되면 내 모든 정성을 다해서 대접하고 싶은 것이 소원이었는데, 그분의 외손자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내 손을 꽉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한 것이다.

 또 한가지 생각나는 일화는, 1995년 KBS 신년축하 ‘열린음악회’에 나왔던 조창호 중위의 이야기이다.
조 중위는 한국전쟁 때 육군중위로 참전했다가 북한의 포로가 되었고 40년 만에 탈출하여 월남한 사람이다. 그는 그를 환영하는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부를 것을 요청 받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애국가뿐입니다. 태극기와 애국가는 극한 상황에서도 나를 살린 오로지 하나의 희망이었습니다. 애국가는 우리 조국의 얼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다음 애국가를 힘차게 불렀다.

 좌옹이 애국가 작사를 하면서 꿈꾸던 민족의 개화와 산업 발전과 교육진흥이 백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이루어지고 있고, 애국가 속에 담긴 민족의 얼이 조창호 중위의 노래 속에 실현되는 것을 보고 감개 무량했다.
 만일 조중위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이곳에서 주문해 만든 특별한 셔츠 한 벌을 꼭 전해 주리라. 그 셔츠의 앞면에는 좌옹 친필의 애국가가, 뒷면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1996년 9월, 한국 광복 50주년 기념강연회 (고려학술재단 주최)에서
“윤치호의 친일협력에 대한 재평가”를 발표하고,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논문 발표회를 연 Koen De Ceuster 박사를 만날 기회가 생겼다. 하버드 대학에서 “윤치호 연구”를 발표한 그의 논문은 비교적 객관성 있게 역사적 가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며칠 후 Koen De Ceuster 박사와 저녁식사를 함께 했는데, 내가 그동안 생각해 왔던 의견과 그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좌옹을 친일 협력자로 보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그릇된 견해에 대해서 초점을 많이 두었다.
좌옹은 세계정보를 환히 알고 있어서 일본의 패망을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포악한 정책이 점점 드러났어도 그는 독안에 든 쥐 격이었고, 비행기 납치범에게 붙잡힌 인질과 같아서, 자신의 의사 표시가 전혀 불가능했음을 역사가들은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주장했다.
 페루 리마의 인질 중에는 본 큐리오라는 신부가 끼여 있었는데, 테러범들이 그에게 나가라고 해도 나오지 않고 인질과 함께 테러 밑에서 다른 인질들을 도와주었다. 그러면 이 신부도 한국식 협력자란 말인가? 아니 오히려 민족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 숭고한 행위가 아닌가.

 역사가가 객관성이 없이 정치적. 사회적. 사상적 편견과 안목을 가진다는 것은 재고의 가치조차 없는 일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윤치호와 김교신”이라는 논문이다.
저자 양현혜는 역사학자랄 수도 기독교 학자랄 수도 없는 어용학자에 불과하다. 그의 논문 중에 가장 큰 잘못은, 좌옹이 자살했다고 결론지은 부분이다. 이 잘못된 전제 때문에 그의 논문 내용의 전개는 전혀 객관성이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좌옹은 개성 시내의 치과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오는 도중에 뇌출혈로 쓰러진 후 약 10일간 혼수상태에 있다가 회복을 못하고 별세하신 사실은, 그 당시 서울에서 개성까지 세 번이나 왕진을 했던 김근배 내과 전문의가 증인이다. 그리고,
좌옹이 별세했다는 부고가 <조선일보> 1945년 12월 8일자와 <동아일보>에 같은 날에 나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산당들은 좌옹이 이승만 박사 때문에 자결한 것이라는 유언 비어를 퍼뜨렸던 그 당시의 목적과 같아서, 현대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어떤 인물의 영향을 받아 쓴 것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 아이러닉한 것은 그 논문을 지도해 준 사람이 현영학 신학박사로, 그는 좌옹의 사위라는 점이다.
   
 이 책을 서울에서 구입하여 읽었던 Coester 교수도, “현대에 와서도 이와 똑같이, 좌옹을 자결한 것으로 정치적, 종교적으로 매도한 양현혜의 <윤치호와 김교신>은 역사적인 재고의 가치가 전혀 없는 책이라”고 말했다.
그는 하바드 대학의 연구교수로 있는동안 윤치호에 관한 더 많은 자료를 찾아냈으며, <좌옹 윤치호 전기>를 꼭 쓰고 싶다고 다짐했다.   Ceuster 같은 역사학자가 좌옹 윤치호의 역사성을 재조명하기 위해 그의 전기를 쓴다는 것은 우리 근세사의 새로운 한 지평이 되리라 생각한다.
아울러 좌옹이 한결같이 사랑했던 이 나라와 겨레의 백 년 앞날에 두었던 그의 꿈이 이제 그의 ‘애국가’ 속에 담긴 우리의 ‘얼’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좌옹이 지은 애국가 가사를 영어로 번역한 것을 3편 소개한다.

1.    By Bishop Donald Trane; Emory University

Until the Eastern Sea and Pack-tu mountain
         drain and wear
God protect’s us, May our homeland
         Live ten thousand years
Stream and hill sides, Roses of Sharon
         Stretch three thousand leagues
People of our nation
         Preserve our land, Korean fair.  

2.  By John. T. Underwood

1.    Until the East Sea’s waves are dry,
Paek-tu-san worn away.
God watch over our land forever!
Our Korea Mansei!
(refrain)
Rose of Sharon, thousand miles of range and river land!
Guarded by her people over may Korea stand!
2.    Like that South Mountain armored pine,
standing on duty still.
wind or frost, unchanging ever,
Be our resolute will.
3.    In autumn’s arching evening sky,
Crystal, and cloudless blue.
Be the radiant moon our spirit,
Stead fast, single, and true.
         4.  With such a will, (and) such a spirit,  
loyalty, heart, and hand,
let us love. Come grief, come gladness,
this our beloved land!

3.By Chung, Tai Jin 정태진

1)Till East Sea and Paek-Tu San return to the Prime dust
When God is for us, our Korea forever stand

 (Refrain)
Beau-ti-fy our homeland with Roses of Sharon
KOREA for Koreans, keep our nation free

2)The pine tree on top of Nam San, our symbol of guard
     Rise’n shine against wind’n frost it is our spirit

3)Our Autumn sky’s crystal clear without a single cloud
      Bright moon wakes our love for our land and sea

4)With our spirit and Soul, show our loyal-ty
      Love Korea, our country, even in sorrow or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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