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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시 판

작성자 yunice
작성일 2014-07-14 (월) 14:47
홈페이지 http://blog.naver.com/doorskyj/120206160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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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친필본 애국가의 필적 감정 결과.SBS그것이 알고싶다 방송

윤치호 친필본 애국가 진본 확인. 애국가 제자리찾기 : 작성자 혜문 스님
2014/07/13 22:53
http://blog.naver.com/doorskyj/220059304662

   미국 에모리대 소장 윤치호 친필본 애국가 진본 확인.

- SBS 그것이 알고싶다. 필적 감정결과 윤치호 친필로 밝혀져
- 윤치호가 친필로 애국가는 1907년 윤치호 작이라 표기
- 50년만의 진위논란 종식, 애국가 작사가 규명의 중요한 변화



미국 에모리 대학 소장 윤치호 친필본 애국가. 1907년 윤치호 작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 캡쳐)

윤치호 친필본 애국가의 필적 감정 결과.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 캡쳐)

미국 에모리 대학 소장 윤치호 친필본 애국가가 윤치호의 친필로 확인되었다.
지난 7월 12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애국가작사가의 미스테리 편은 윤치호 친필본 애국가에 대해 필적감정을 의뢰,                        윤치호의 친필이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내용을 방송했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 작사가 확정을 위해 심의 위원회를 구성하고, 심의한 결과 11대 2로 윤치호 단독 작사설이 유력했으나 만장일치가 아니라는 이유로 작사자 미상으로 판단했다. 심의 당시 윤치호의 친필본 애국가도 윤치호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제출되었으나, 진위논란에 휘말려 채택되지 않았다.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최남선)은 심의 보고서의 마지막에 “1907년 윤치호 작이 위조가 아니라면 윤치호 작이라해도 무방하다”라는 언급을 남긴 채 ‘작사가 미상’으로 종결시켰다.

윤치호 애국가 친필본이 진본으로 확인됨에 따라 해방 70돐을 앞두고 애국가 작사가 규명을 위한 조사는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지난 2014년 1월 에모리 대학에 방문, 윤치호 친필본을 열람했던 혜문스님(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은
“ 애국가 작사가 규명의 커다란 난제가 해결된 일이다. 지난 50년간의 진위 논란이 종결되었으므로,                                                  1898년에 등장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애국가 후렴구의 등장에 대한 규명작업이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애국가의 후렴구가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가가 규명된다면, 애국가 작사가 문제는 실마리가 풀릴 것으로 기대한다. 나아가 안창호 작사설에 대해서도 자료조사와 검증작업이 진행되기 바란다” 고 말했다.

대한제국 시기 외무협판(외교부 차관)이었던 윤치호와 남궁억(윤치호의 사돈)은 무궁화를 대한제국 국화로 채택, 보급한 바 있다. 윤치호 작사설과 대립중인 안창호 작사설은 증언과 주장은 있으나 아직까지 실질적인 문헌자료가 제출되지 못하고 있다.

---> SBS 방송에서 노동은 교수가 나오셔서 1896년 독립문 정초식에 배재학당 학생들이 불렀던 <무궁화가>를 언급했습니다.           애국가에 등장하는 '무궁화 삼천리 ~'란 후렴구가 <무궁화가>에 나오는 걸 근거로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을 비판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무궁화가 국화로 채택된 것은 1897년 대한제국 성립시기란 점에 주목해 봅니다.
당시 외무협판(외무부 차관) 윤치호와 남궁억의 주장으로 인해서 입니다.
그리고 윤치호가 배재학당에서 교사로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역시 무궁화가도 윤치호와 연관성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은 교수님의 주장은 윤치호설의 전면부정이라기 보다 오히려 안창호설의 부정근거가 될 듯합니다.
안창호는 배재학당과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참고로 저는 애국가 작사가 규명에는 관심이 있지만, 윤치호 설을 지지하거나 안창호 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의 기록을 놓고 전후관계를 살펴보는게 중요하다는 입장입니다.)

[출처] 윤치호 친필본 애국가 진본 확인. |작성자 모니노



윤치호 그는 애국가 작사가 인가? 애국가 제자리찾기 2014/07/11 11:05
http://blog.naver.com/doorskyj/220056958525

(사진; 에모리 대학교 도서관에서 윤치호 친필본 애국가를 열람하는 모습. 혜문스님, 안민석 의원 . 진본은 도서관의 요청으로 사진 촬영이 금지되었다.)

윤 치호는 애국가 작사가인가?
이 물음에 대한 첫번째 단초는 미국 에모리 대학에 소장된 애국가 친필본의 진위 여부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 작사가를 심의한 끝에 11대 2로 작사가로 윤치호를 추정했다. 그러나 만장일치가 아니란 이유로 윤치호 작사가설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 보고서의 끝에 당시 심사위원장 최남선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 1907년 윤치호작이 진본이라면 애국가 작사가는 윤치호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 로부터 60년이 흐른 뒤, 나는 애국가 작사가의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윤치호 친필본을 소장하고 있는에모리 대학에 방문했다.
유족들이 윤치호의 친필본을 에모리 대학에 기증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에모리 대학은 유족들의 동의를 얻어 문서를 공개하면서 " 친필본을 기증 받은 뒤 최초로 진본을 공개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거듭 에모리 대학과 유족들에게 공개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에모리 대학에 소장된 윤치호 친필본 애국가.(복사본) 1907년 윤치호 작이라고 본인이 작사가임을 밝혀 놓았다.
  친필본은 1945년 9월에 쓰여 졌다고 한다.

  애국가 친필본 뒷면의 서명. 1945년 9월 아버지께서 친히 써주신 것이라는 딸의 기록이 적혀 있다.

힘이 담긴 글씨가 기괴하고 원숙한 필체로 구불구불 숨고르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진으로 보았을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마치 한편의 그림처럼 정성을 다해 써내려간 느낌이었다.
이렇게 개성이 묻어난 작품을 누군가가 대신 작성한 위조라고 말할 수는 없을 듯 했다.

친필본 뒷면에는 “1945년 9월 아버지께서 친희(친히) 써주신 것”이라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이것을 두고 1907년이 아니라 1945년 쓰여진 기록이므로 위작혹은 가치가 없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 문서가 갖는 사료가치는 작성 시점이 1907년이냐 1945년이냐가 아니라, 자신이 애국가 작사가라고 밝혔다는 점에 있으므로 작성시기의 문제는 일단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고 본다.
윤치호 친필본의 위작 논란은 윤치호의 친필여부에 초점이 모아져야 다음단계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 연 이 문서는 윤치호 친필본인가? 거기에 대해 나는 윤치호의 친필이라고 확신한다.
그의 필체는 괴서라고 할만큼 특이한 개성이 묻어 나기 때문이다.
한글 붓글씨에서도 윤치호 만이 가진 필체의 독특함이 여전히 묻어 난다.
윤치호가 친일파이긴 하지만 나는 자연인으로서의 윤치호가 지닌 진실성을 믿는다.
그는 자신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을 그런 파렴치한은 아니었다. 대한제국 시기 부터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의해 3년이나 형무소를 복역하던 시기의 진정성을 보면 그의 친일은 늘 아쉬운 사건이다.

이 제 그의 친필본 여부를 검증할 시점이 온듯하다.
나 만의 시각에 의한 확정이 아니라 과학적 검증,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검증을 거쳐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에모리 대학 친필본이 윤치호의 친필본이 맞다면, 애국가 작사가 확정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 할 것으로 생각한다.
윤치호 그는 진정 애국가 작사가 일까?

윤치호 필적 모음. 가장 우측은 애국가 친필본에 서명된 윤치호 필적. 좌로부터 3개는 다른 문서에 기재된 윤치호의 글씨




1955년 국사편찬위가 촬영한 윤치호 친필본 사진. 아래 부분은 윤치호의 글씨들









윤치호 애국가 친필본 원본을 열람하다. 애국가 제자리찾기
2014/07/11 10:39 http://blog.naver.com/doorskyj/22005693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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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애국가 친필본 원본을 열람하다.
혜문(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조계종 승려)
*2014년1월 31일 에모리대학에 소장된 윤치호 친필본 애국가를 직접 열람하고 쓴 칼럼입니다.

에모리 대학에 소장된 윤치호 친필본 애국가.(복사본) 1907년 윤치호 작이라고 본인이 작사가임을 밝혀 놓았다.
친필본은 1945년 9월에 쓰여 졌다고 한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 작사가 확정을 위한 심의를 진행했었다.
당시 국편의 심의 결과 윤치호 작사설은 11대 2로 우세했으나, 만장일치가 아니란 이유로 부결, 현재까지 ‘작사가 미상’ 상태로 남겨지게 되었다.
그 당시 보고서를 살펴보니 “1907년 윤치호 작이 위조가 아니라면 윤치호 작이라해도 무방하다”라는 최남선 위원장의 언급을 남긴 채 종결되고 있었다.
윤치호가 자신이 작가가라고 밝힌 친필본은 1990년대 유족들에 의해 에모리 대학에 기증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애국가 작가가의 규명을 위해서는 윤치호 친필본의 확인과 친필여부가 애국가 작사가의 규명을 위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과제가 되지않을까? 2014년 1월 31일 오후 2시 에모리 대학의 애국가 열람은 그런 취지에서 추진되었다.

유족들의 동의하에 원본을 열람하면서 사실 좀 놀랐다. 윤치호 친필본에는 이른바 노익장이라고 할만큼 힘이 담긴 글씨가 기괴하고 원숙한 필체로 구불구불 숨고르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진으로 보았을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마치 한편의 그림처럼 정성을 다해 써내려간 느낌이었다. 이렇게 개성이 묻어난 작품을 누군가가 대신 작성한 위조라고 말할 수는 없을 듯 했다.
친필본 뒷면에는 “1945년 9월 아버지께서 친희(친히) 써주신 것”이라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이것을 두고 1907년이 아니라 1945년 쓰여진 기록이므로 위작혹은 가치가 없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 문서가 갖는 사료가치는 작성 시점이 1907년이냐 1945년이냐가 아니라, 자신이 애국가 작사가라고 밝혔다는 점에 있으므로 작성시기의 문제는 일단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고 본다.
윤치호 친필본의 위작 논란은 윤치호의 친필여부에 초점이 모아져야 다음단계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서가 1907년이 아니라 1945년 쓰여졌으므로 ‘가치’가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가란 가정에서 본다면, 이 문서의 가치는 좀더 다른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안익태 친필 애국가 악보는 49년도에 작성되었지만 2011년 근대 문화재 476호로 등록되었다.
동일한 입장에서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가가 맞다면, 1945년 쓰여진 애국가 친필본은 국가기록물로서 문화재적가치가 상당하다고 할 것이다.


에모리 대학에 보관된 찬미가 재판본. 1908년 6월 25일 발행된 재판본이다.
역술자 윤치호 발행자 김상만으로 광학서포에서 발매되었다. 찬미가란 제목은 찬송가 모음집이란 의미이다.
찬미가 14장에 애국가가 수록되어 있다.
에모리 대학에서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의 원본도 확인할 수 있었다.
윤치호는 1908년 ‘찬미가’라는 교회 찬송가집을 번역 출판했는데, 찬미가의 14장에 현행 애국가 가사와 후렴이 거의 그대로 수록되어 있었다.
찬미가에는 ‘윤치호 작’이 아니라 윤치호 역술(譯述 )이므로 작사가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대를 살았던 유길준이 서유견문록을 저술할 때, ‘집술’이라고 기재한 것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개화기의 지식인들은 ‘역술’ ‘집술’과 같은 언어로 자신들의 저작물을 남기는 풍조가 있었던 듯 하다.
게다가 1908년 윤치호 역술譯述이란 표기가 지닌 부족함은 1907년 윤치호 작이란 친필본의 존재로 다시 보완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19010년 신한민보에 윤치호 작‘ 국민가’란 제목으로 애국가 가사가 수록된 기사도 에모리대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런 문헌기록을 토대로 볼 때, 애국가와 윤치호가 지닌 연관성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할 것이다.
윤치호 친필본 열람을 놓고 일부 사람들은 ‘윤치호 작사설’을 주장하기 위한 행보가 아니냐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친필본을 열람하는 것은 애국가 작사가 규명을 위한 증거들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일뿐, 윤치호를 옹호하거나, 안창호 작사설을 부정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윤치호, 안창호를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창작하고 보급했던 민족의 노래라고 생각한다.
주요 작가가가 친일파란 이유로 애국가 작사가란 사실이 부정되거나 ‘작가미상’ 상태로 남겨 두려고 해서도 안된다.
사실은 사실로써 충분히 규명되어야할 당위성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이제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난지 70년이 가까운 세월이 다가온다. 민족의 노래가 된 애국가를 언제까지 작가미상의 상태로 방치할 것인가. 정부는 광복70주년을 맞는 2015년 8월15일까지 애국가 작사가를 규명하기 위해 즉각 ‘심의기구’를 설치하기를 다시 한번 촉구한다.



안민석의원과 윤치호 관련 자료를 확인하는 모습




애국가 친필본 열람을 앞두고 에모리 대학교 도서관측의 설명을 듣는 모습. 우측은 당시 에모리 도서관 소개와 통역을 담당한 분. 김대중 대통령의 손자라고 한다.



윤치호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으로 감옥에서 복역 당시 아내에게 보낸 한글 서신.
[출처] 윤치호 애국가 친필본 원본을 열람하다.|작성자 모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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