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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ysk
작성일 2017-01-09 (월) 10:47
ㆍ추천: 0  ㆍ조회: 170      
IP: 61.xxx.43
윤치소 장로에대한 회고록
注; 이 글은 윤택선 장로 생전시에 부친이신 윤치소 장로에 대한 회고록을 작성 하였었는데, 그 기록을 안동교회 담임 목사였던 유경재 목사(現 안동교회 원로 목사)께서 보관 하고 있었던 내용입니다.

구한국 군무 법무 양대신 윤웅열(尹雄烈)씨의 조카로 또 안성군수 강계부사를 역임하신 윤영렬(尹英烈)씨의 차남으로 참판과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시고 나를 낳아주신 분이 바로 윤치소 장로님이시다.
그분은 우리 형제들에게 붓글씨를 배우도록 주선해 주셨는데, 그 선생님은 바로 안동교회 장로님이신 이주완 장로님이셨다.
두 분은 바둑친구로서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같이 어울려 다니셨던 것 같다.
두 분이 말씀하시던 것을 엿들으면 홍수레골 김창제(金昶濟)씨 댁에서 조중완, 이주완 장석윤 제씨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날이 안동교회의 창립주일이 되었다.
그런 뒤 현재 장소에 교회당을 짓고 난 뒤 두 분이 같은 해(1917년)에 장로로 장립되셨으니 정말 깊은 인연이라 할 수 있다.
우리 형제들은 (源善, 漢善, 나) 안동교회 유치원에 붓과 종이를 들고 가서 엎드려 글씨를 배웠다. 그리고는 누가 얼굴이나 손에 먹을 제일 많이 묻혔나 서로 손가락질 해가며 웃었던 일이 생각난다.
당시 우리 집은 위로 할아버지(윤영렬씨)와 할머니(정부인 청주 한씨)를 모시고 있었으며 백부님(尹致旿씨)과 또 사촌들(尹日善)이 합하여 30여명이나 한 집에 살고 있었다. 그 모든 사람들을 우리 아버지께서 부양하셨다.
안동교회 건물을 신축할 때 아버님께서 천원을 헌금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모두 입을 딱 벌리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평소에 종이 한 장도 아껴 쓰셨으며 편지지나 헌 봉투들이 그대로 버려지는 일이 결코 없었다. 헌 신문지는 물론 앞뒤가 새까맣게 먹칠이 된 후에라야 버려지곤 하였다. 혹시 자녀들 중에 휴지 두 장을 한꺼번에 집어서 쓰는 것을 보시면 당장 불호령을 내리셨다. 그러던 분이 천원이라는 거금을 헌금 하셨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안동예배당에 대한 향심은 극진하셨다. 주일 아침이면 일찌감치 아침을 드신 뒤에 마당에서 온 식구들을 재촉하셨다. 늦잠 자던 아들이나 모양을 내던 며느리들이 허겁지겁 신을 신고 나서면 한 부대를 이끌고 아버지는 만족하신 듯 예배당으로 향하시곤 하였다. 그리고는 행여 어느 교인이 빠지지나 않았나 하고 맨 앞자리에 앉아 계속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곤 하셨다.
돌아가신 뒤 아버지께서 쓰셨던 사랑의 골방 속에서 성경주석책들이 한아름 쌓여있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말씀을 공부하셨구나 하고.
여름철만 되면 해마다 함경도 석왕사로 식구들을 끌고 피서를 가셨다. 거기서도 주일마다 우리 집 안방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거기는 아직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인도하시는 예배에 참석하고자 아래 윗방이 가득 가득 차서 앉을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식구들끼리만 예배를 드렸으나 차차로 그 소문이 퍼지자 피서객으로 와있던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서울에서는 틈만 나면 뒷마당이나 앞마당에 피어있는 꽃들을 꺾어 아픈 교우들을 심방하셨다. 특히 사돈 되시는 둘째 형님(浣善)의 장모님을 전도하셔서 그분이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돌아가실 때까지 주기도문을 외우며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주일만 되면 안국동 우리 집은 매번 큰 잔칫날 같았다. 교회에서 수고하는 성가대원들이나 제직 또는 목사님도 예배가 끝난 뒤에 점심이나 또는 저녁까지도 드시게 했고, 혹시 부흥회라도 있으면 장소가 교회와 가까웠던 관계로 강사 목사님을 바깥 사랑채에 주무시게 하고 그 수발을 들어드리곤 하였다.
돌이켜 보면, 지금 우리에게 아무리 그만한 재물이 있더라도 교회를 받드는데 있어서 아버지만큼 할 수는 없을 것만 같다. 그것은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셨던 마음과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을 받들고자 하는 믿음이 없이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최거덕 목사님께서 새로 부임해 오시자 사례금을 전에 계셨던 교회보다 더 적게 드렸던 사실을 아신 뒤 대번에 액수를 배로 올리기로 당회에 건의하셨다. 이유인즉 ‘목사님께서 돈이 있다고 놀음을 하실거냐 술을 잡수실 것이냐, 우리 교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실 것이 아니냐, 목회자가 살림을 걱정하시게 되면 결국 교인들한테 그 영향이 온다’고 강력히 주장하셨다는 것이다. 그런 장본인은 집안의 전기를 끄지 않거나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은 자손이 있으면 당장 손수 잠그시는 분이셨다.
할아버지께서 강계부사로 임명되셨을 때의 일이다. 처음에 할아버지께서는 머나 먼 곳을 찾아가실 엄두가 나지 않아 가시기를 꺼렸다는 것이다. 그때 아버님께서 떠나시기를 권고하시며 드리는 부탁이 “아버님, 강계에 가신 뒤의 일체 비용은 서울 본가에서 보내드리겠으니 그곳 관아의 공물은 전부 폐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부임 즉시, 부하로부터 공물 헌납자 명부를 인수하여 태워버리셨다. 그리하여 청렴정치의 본을 보여 지방민들이 극구 칭찬하게 된 것도 다 아버님이신 윤장로님의 생각과 결단 때문이었다.
1942년 가을에 일본 당국에서 사람을 보내어 안동교회에 다니는 전문대학생들 명부를 보자고 했을 때 목사님이 그 명부를 감추셨다. 그 때 아버지가 목사님께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독일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큰소리 탕탕 치더니 얼마 안 가서 망하지 않았습니까? 일본도 저렇게 우리를 들볶다가는 얼마 안 가서 망합니다.”
정말 아버지 말씀대로 일본도 그로부터 3년 뒤에 무조건 항복을 하고야 말았다.
돌아가시기 조금 전 몸이 편찮아 자리에 누워 계실 때 손자나 손녀들한테 신문 좀 읽어달라고 하셨다. 그 때 일본 비행기가 적기 몇을 격추시켰고 일본 군대들이 어느 나라 상륙 작전에 성공했고 등 그대로 읽어드리면 “듣기 싫다. 모두 거짓말인데 집어 치워라” 하고 큰소리로 꾸짖으신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해방되기 1년 전(1944년 2월 20일)에 하늘 나라로 가셨다. 그러나 지금도 하느님 곁에서 우리 온 식구들과 특히 몸바쳐 섬기고 사랑했던 안동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리라 굳게 믿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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