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없음
내용없음9
내용없음10

회원등록 비번분실
자 료 실
HOT menu

     

문   서

작성자 윤경남
작성일 2008-03-14 (금) 09:52
첨부#1 애국가_작사자의_진실.doc (58KB) (Down:101)
문서名 연세춘추
ㆍ추천: 0  ㆍ조회: 1735      
IP:
애국가 작사자의 진실
愛國歌 作詞자의 眞實: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윤경남 연세대학매거진 <계간; 진리.자유> 1999.겨울제36호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이렇게도 아름답고 절실한 나라 사랑과 하느님 사랑을 노래할 수 있을까 새삼 감탄하면서 다시 한 번 불러 본다.
좌옹이 소천한 지 53년 되는 1998년 4월3일에 와서야 ‘좌옹 윤치호 문화사업회’가 조직된 것을 생각하면, 그분의 파란 많은 삶과 선각자적인 업적에 비해 부끄럽기만 하다. 더욱이 그분이 작사한 애국가를 ‘작사자 미상’으로 방치한 채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은, 얼을 뺀 인간의 겉모습만 보는 것 같아 더 송구스럽기만 하다. 다행히도 사업회가 생기지 않은 것보다는 미약하나마 활동을 시작한 것이 더 나은 일인지 좌옹의 인격의 진가를 밝혀 나가는 기회가 자주 생기고 있다.
   좌옹 윤치호 문화사업회는 우선 해마다 선집을 내기로 하고, 작년에 선집 1권  <윤치호의 생애와 사상>에 이어, 올해는 선집 2권 < 좌옹 윤치호 선생 약전>을 냈다. 이어서 해마다 기념 논문집과 전기, 좌옹 연구 국제 세미나 등을 추진할 것이다. 이 국제 세미나는 한국과 미국에 있는 좌옹의 친지들이 모금하여 좌옹이 영문으로 쓴 <윤치호 일기>11권을 구입하여, 한국학과가 있는 외국 대학교에 보내 연구한 것을 발표하는 기회를 만들고 있다.
60여 년을 두고 쓴 그의 영문일기는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문학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하며, 한국 근현대사를 구석 구석 밝히는 역사의 등불이 되리라 믿고,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에서 이 방대한 문화적 역사물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큰 작업을 시작하였다. 좌옹 문화사업회 창립과 같은 시기에 번역출간을 시작한 기적적인 우연의 일치에 감사할 뿐이다.
   역사는 곧 진리이기 때문에 지금은 아무리 진흙 속에 파묻혀서 보이지 않는다 해도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세월이 그 덮인 진흙을 벗겨주면, 빛나는 보석처럼 그 빛을 발휘하고야 만다. 역사가들이 연구하고 발굴한 본래의 모습을 찾는 데 우리도 참여할 때가 온 것 같다.
좌옹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규명한 논문들
많은논문들이 있지만, 정광현교수(전 국립중앙도서관장, 서울대법대교수),
김선풍 교수(중앙대 민속학과 교수), 김연갑 선생(한국아리랑연구회 상임이사), 그리고 백낙준 박사(전 연세대 총장 역임)의 논문을 소개하려고 한다.
정광현 교수의 <애국가의 유래>
(1955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 낸 진정서 중에서)
1955년에 국사편찬위원회(국편위)는 역사계의 권위자들에게 현행     애국가 작사자 자료를 제시하고 위원회를 소집했다. 정광현 교수는 자신이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자료를 조사한 결과,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임이 분명한 것을 찾아내어, 그 자료와 진정서와 좌옹의 친필 애국가를 제시했으나 채택이 되지 않자, 이에 대한 진정서를 냈다.  국편위는 애국가 작사자 후보로 민영환, 안창호, 김인식, 최병헌, 윤치호 등을 세우고 위원회를 열었으나 윤치호 작 찬성이 11표, 부표가 2표였는데, 2명의 반대표 때문에 무산시켜 버렸다.
좌옹의 사위이기도 한 정 교수는 1945년에 애국가 친필을 받아 국편위에 제출했다가 채택이 되지 않자, 미국에 있는 큰아들 정태웅 씨에게 보관하게 했다가, 1997년에 좌옹의 모교인 에모리대학에 기증했다. 단, 대한민국이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임을 공인할 때 대한민국에 돌려 준다는 조건을 달아두었다.
정 교수가 애국가 친필을 증거로 제시할 때 1907년 그가 세운 한영서원에서 부르던 <찬미가>도 함께 제시했다면, 틀림없이 통과되었을 것이라고 김연갑 선생은 아쉬워했다.
2. 김 선풍 교수의 ‘애국가 연구’(<윤치호의 생애와 사상에서)
김선풍 교수는 “국가 혹은 애국가는 민족의 심금에 공명을 얻고 정서적 공감대 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국가란 민족의 노래이므로 그 민족의 이상과 꿈을 노래 속에 그림처럼 펼쳐 보여야 할 것이며, 민족 정신이 담겨 있어서 힘과 용기를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좌옹이 애국가를 작사하고, 스코틀랜드 민요곡 ‘올드랭사인’에 붙여서 불렀다는 증언을 한 신영순(당시 한영서원 학생), 정광현, 백종섭, 주영환, 최규남, 백낙준, 김동성, 최남선 등의 예화를 들었다.
105인 사건 당시 식민지 경찰이 좌옹이 설립한 한영서원에서 불순책자를 몰수 하였고, 이에 연루되어 체포된 신영순의 재판기록이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조서에 ‘윤치호가 전에 지은 애국가’라는 구절이 있다. 다시 말해서 윤치호 자신이 작사한 애국가가 들어있는 <찬미가>등을 몰수당한 것이다, 따라서 민영환, 안창호, 김인식, 최병헌, 윤치호 등의 작사 설 중에서, 1907년에 간행된 <찬미가>에 나온 윤치호의 애국가가 가장 유력한 증거로서 윤치호 작사 설이 확립된다.
김 연 갑 선생의 <애국가 작사가 연구> (<윤치호연구>에서)
김연갑 선생은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이다”라고 주장했다. 1955년 문교부와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는 최종회의에서 11:2라는 표결로 윤치호가 작사자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만장일치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합작 설로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여기서는 당시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정서가 반영된 것으로 본다. 이 결과 애국가 작사자는 미상이거나 윤치호. 안창호의 합작 설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후 기독교 계통에서는 윤치호 작으로, 흥사단 계통에서는 안창호 작으로 주장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윤치호 작사 설은 다음 근거를 통해 입증이 된다.
윤치호 역술 <찬미가>와 <친필 가사지>의 증거력을 다른 거론자들의 논리로는 극복할 수 없다.
윤치호를 중심으로 한 인적 관계나 정황이 문헌 증거와 부합된다.
윤치호 본인이 직접 자필로 작사자임을 밝혔다.

도산 안창호가 미국 상항에서 창간한 신한민보가 (1910년) 윤치호 작 ‘국민가’(현행 애국가와 동일내용)를 발표 했을 때 이의를 제기한 이가 없었다.
윤치호, 최병헌, 김인식 모두가 관계를 맺고 있는 감리교에서 윤치호 설이 통설이다.
오늘의 대한민국 국가 ‘애국가’는 윤치호에 의해 1907년에 작사되어 1908년에 재판된 <찬미가>에 수록, 한영서원과 대성학교 학생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3.1 운동 현장에서 불려져 ‘역사의 노래’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현 애국가는 다음과 같이 표기되어야 한다. “1907년 윤치호 작사, 1935년 안익태 작곡, 국가 ‘애국가’는 1919년 임시정부에 의해 국가 대용으로 채택되고, 1940년 국가로 준용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국민과 정부로부터 국가로 공인 받았음.”
곧, “윤치호 작사, 안익태 작곡, 대한민국 국가 ‘애국가’”임을 국가 상징을 연구하는 김연갑 선생은 강력하게 주장했다.
백낙준 박사의 <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고> (김을한의 <좌옹 윤치호전>에서)
좌옹은 1941년에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선배이다. 이에 대한 존경심과 개인적인 친분과 신뢰 관계로 인해 백 박사는 좌옹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첫째, 좌옹은 을사조약 이후에 한영서원을 설립하고 교장이 된다. 그때 학교에서 매일 기도회와 절기 때마다 부를 애국가와 성가 번역한 것을 모아 1908년에 <찬미가>를 간행했다. 백박사가 좌옹에게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가고 물었을 때 좌옹은 그 찬미가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하여 보낸다. 그리고 현행 애국가는 자신의 작사라고 서면으로 증언한 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애국가 작성의 구성과 내용이 좌옹의 생활 환경과 부합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의 근거로 확인할 수 있다.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고종을 모신 충신다운 점.
애국애족의 정신 함양을 조국 강산의 풍경과 기개를 묘사하고  예찬한 문학인의 필법이라는 점.
하나님께 바치는 도움과 보호의 기원은 기독교인 윤치호의 애국 염원이라는 점.
이 애국가의 합창으로 애국심을 환발(?發)하여 조국 근대화의 일단을 삼으려던 ‘민족의 선각자’ 윤치호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자료들
1997년 까지는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 설에 대한 자료가 <찬미가>와 좌옹의 따님인 문희 씨에게 써준 ‘애국가’ 친필 정도였다.
그런데 1998년에 중요한 자료가 발견되었다. 2월9일에 서울출판회관에서 김연갑 선생과 이명화 선생(독립기념관 연구원)이 ‘애국가 작사자, 누구인가?’ 하는 토론회를 열고, 좌옹 윤치호와 도산 안창호를 각각 발표했다.
그 당시 도산 측의 연사로 도산의 자료를 찾던 이명화 선생이 1910년 9월21일자 신한민보에 “윤티호 작 ‘국민가’”로 현행 애국가 4절이 실린 것을 찾아내었다. 이 신문은 애국가 작사자로 추측해 온 도산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한 창간호였다.
1999년 2월 28일에 KBS TV에 방영된 ‘KBS 일요스페셜’에서 ‘애국가의 작사자는 누구인가?’하는 주제로 애국가 작사자를 찾는 광범위한 취재 현장을 보여 주었다. 앞에 말한 자료 외에, 고려대학교 대학원 도서관에서 1915년 한영서원의 신영순 선생 재판기록이 나온다. 경기도 경찰부의 불온문서 재판에 증거물로 “윤치호가 이전에 지은 애국가”라는 표현이 나온다.
음악평론가이며 치과의사인 김종만씨는 1904년부터 1920년 사이에 부른 미국 한인 찬송가 속에 “윤선생 티호 군 작사”로 적힌 현행 애국가를 보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국제한국연구위원장인 최서면 박사가 보여 준 자료가 있었다. 그것은 ‘요 시찰 한국인 보고서’인데, “1910년 8월15일의 일본 한국유학생 모임에서 현행 한국 국가를 폐하고 윤치호의 국가를 부르기로 결의했다”는 내용이었다.
최근에 좌옹 윤치호 문화사업회 회장인 윤춘병 감독에게서 받은 자료에는, 한영서원 신영순이 재판을 받던 때보다 훨씬 뒤인 1934년의 재판기록이 나왔다. 신영순 선생과 함께 재판을 받았던 이상춘 선생이 다시 경찰에 소환되었는데, 그 불온문서인 <찬미가> 중의 애국가를 불렀다는 것을 그의 부인 류홍옥씨가 증언을 했다. 그리고 그 노래를 적으라고 하여 한글로 지금의 애국가를 4절까지 쓴 것이다.
< 윤치호 영문일기>를 읽고 ‘윤치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군테 괴스테르 교수(네덜란드 라이덴 대학)는, 1995년 서울에서 광복회 주관으로 광복 50주년 기념연사로 초청을 받아 ‘윤치호의 친일협력에 대한 재평가’를 강연했다. 그는 그 원고를 <윤치호 영문서한집>(윤경남 옮김)에 부록으로 실릴 수 있게 해주었고, 그 원고를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지정학적인 조건 때문에 좌옹이 자기 민족에게 오해를 받고 있어요. 흑백논리가 강한 나라니까요. 일본이나 미국 어디에서나 좌옹 선생을 민족주의적인 애국자라고 말하는데, 그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나라는 오직 대한민국 밖에 없습니다.”
다음 해에 괴스테르 교수는 하버드 대학에서 <윤치호 연구>를 발표했다. 그곳에서 그는 좌옹의 외손자인 정태진 박사와 만나서, 사람들이 좌옹을 친일협력자로 보는 그릇된 견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역사가가 정치적, 사회적, 사상적 편견을 갖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좌옹이 1945년 12월8일, 개성자택에서 뇌일혈로 돌아가셨는데, 그 당시 공산당은 좌옹이 이승만 박사 때문에 자결했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현대에 와서도 이와 똑같이, 좌옹을 자결한 것으로 정치적, 종교적으로 매도한 양현혜의 <윤치호와 김교신>은 역사적인 재고의 가치가 전혀 없는 책이라고 괴스테르 교수는 말했다.
양현혜는, 그의 책에 ‘좌옹이 자결한 것은 반민특위에 1급 반역자로 기소되자 자결해버렸다’고 했다.
‘반민특위법은 좌옹 서거후인 1948년에 제정된 것이다. 그러면 1945년 12월6일에 개성자택에서 가족에 둘러싸여 조용히 운명한 좌옹(1945.12.8. 조선일보 기사와 부고 참고)을 3년 후에 이승만 정권이 그의 시신을 꺼내다 부관참시를 했단 말인가?’하고, 책이 출간 된 해에 이 주제를 발표한 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필자가 질문하자, 그 법이 1948년에 시행된 것을 몰랐다고, 그 논문으로 동경대학교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양현혜가 대답했다.
그의 책 ’윤치호와 김교신’은 ‘현대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어떤 인물의 영향을 받아서 쓴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라고, 정태진은, < 윤치호의 생애와 사상>에서 평가했다.
괴스테르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근대사에서 윤치호의 위상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은, ‘그를 민족주의자로 취급할 것인가, 또는 친일인사로 매도해 버려야 할 것인 가’ 하는 선별적인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윤치호의 사상적 변천 과정, 그리고 그가 자신의 생각을 정립하게 된 전체적인 맥락을 분석한다면, 외관상 상충되는 것처럼 비추어지는 사실들, 윤치호에 대한 상반되는 두 가지 평가가 공존할 수 있게 만드는 상충되는 사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일제의 압력으로 창씨개명을 강요당했을 당시에도, 민족주의 단체로 알려져 있던 진단학회에 헌금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의 굴복은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윤치호는 국력이 강한 국가가 개화된 엘리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 있고 개화된 시민의 바탕 위에 건설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韓民族이 일본의 호전성에 노출되어 있다고 보고 또 이를 터득함으로써만 국가의 생사가 걸린 국제사회에서의 투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주장을 적기도 했다. 그리고 기독교 윤리에 바탕을 둔 인간 평등이라는 보편적 원칙의 도입이 장차 한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관건이라고 믿었다.
          윤치호의 파란 많은 극적 생애를 전기로 쓰겠다고 결심한  괴스테르다운 발언이었다.
    좌옹은 또한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불구속 유예처분을 받았는데, 이 구락부는 그 당시에 이승만에게 독립자금을 대는 루트였다. 좌옹은 배재학당에서 그의 제자였던 이승만에게 해방의 날이 오기까지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다. 이 사실은 좌옹의 영문일기에도 적혀있고, 그의 셋째아들 장선 씨가 해방 직후에 샌프란시스코 한국 총영사로 임명될 때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그 후원에 대한 인사를 직접 받았다.
    좌옹은 소천하던 날까지도 이승만 박사와의 모종의 계획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승만 박사에게 그 약속을 지키도록 경무대로 서신을 보냈지만, 그 회답을 끝내 받지 못하고 더 이상 흉한 세상을 안 보게 된 것이다.
    <윤치호 서한집>에 실려 있는 좌옹의 명상록2는, 혼자 애국지사인 듯 금의환향하는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임을 1986년에야 알았다. 선각자인 좌옹의 선견지명이 그 당시에 사본을 만들어 둔 행동은 백 년쯤 지나서야 그 진가를 발휘한다. 좌옹은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 사본을 친구인 하디 박사의 사위 피셔 박사를 통해 하지 중장에게도 준 것이다. 이 편지는 해방 직후의 우리 사회를 훤히 보여주고 있다.
 괴스테르 교수는 또 이런 말을 했다. “좌옹에 대하여 언급하는 친일협력의 문제점은 그것이 갖는 감정적 성격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합병이 되어도 언젠가는 국권을 되 찾을 날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 때를 위해서 젊은이를 교육시켜 국제사회를 바라보게 했고, 하느님을 믿는 신앙만이 그 힘을 주는 근원이므로 교회와 사회사업에 앞장 섰던 좌옹!
    지금 그의 공은 어디로 가고, 과만 남은 듯 서로 돌을 던지기에 바쁘다. 한 인간의 삶을 평가할 때 그 공과 과를 공정하게 조명하는 것이 역사를 바로 보는 길이 아닐까. 좌옹은 분명히 일제 시대에 대해 한을 품고 우리 민족이 투사하고 싶어하면서도 그 실상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그림자’임에 틀림이 없다.
    사람들은 좌옹의 공과 좋은 면은 보려고 하지 않고, 그 과나 잘못된 면만을 보려고 든다. 그의 잘못은 바로 그들의 열등의식에서 내뿜는 도깨비 같은 ‘검은 그림자’이다. 자신이 또는 그의 조상이 일제시대에 무력하고 비굴하게 지냈던 그 취약점을 마치 좌옹 탓인 듯 잘못 투사하면서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그러한 이들에게 2천년 전에 예수가 하신 이 말씀을 꼭 들려 주고 싶다. “남을 비판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빼내어 주겠다’고 하겠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  
    스위스의 분석심리학자인 구스타브 융은 그의 <종교와 심리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림자의 통찰은 사람으로 하여금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데 필수적인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한다. 또한 자기의 그림자를 보고 자신에 관한 앎을 견딜 수 있을 때, 그는 최소한 개인적 무의식을 극복한 것이다.” 융은 ‘그림자의 인식’이 세계의 문제에 해답을 주는 첫걸음임을 시사하고 있다.
    애국가에 대한 초점이 자꾸 빗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마음속에 자신을 먼저 알고 나서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 성숙함이 없이는, 우리의 애국가 작사자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우리가 진실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조국의 얼이 담겨 있어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를 사랑하게 만든 이 기적과 신비의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가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애국가를 국가의 첫째 가는 ‘상징(象徵)’으로, 따라서 현행 애국가를 ‘국가(國歌)’로 확립하는 역할에 힘을 합쳐야 하리라.
    그때 비로소 정치 개혁자임은 물론 사회문화적인 개혁자이며, 기독교 개혁자인 좌옹 윤치호 선생의 참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좌옹 선생이시여, 아무쪼록 그 날에 우리의 좁은 시야를 한없이 넓은 자유와 평화의 세계를 향해 열 수 있는 성령의 새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당신이 사랑했던 이 나라를 위해 주님께 간구하소서!
(윤 경 남: 좌옹 윤치호문화사업회 이사, 국제펜클럽 회원)
  0
3500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57 윤치소 장로에대한 회고록 ysk 2017-01-09 169
56 윤치소 (김명구 박사 강연) 관리자 2014-02-27 419
55 오음 윤두수 운영자 2014-01-13 465
54 윤치호 연설문(번역문) 최호진(윤은경 남편) 2012-10-18 570
53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가 맞다 ! 월간 중앙 10월호 발췌 2012-10-10 495
52 애국가 작사자의 진실 윤경남 2008-03-14 1735
51 한국의 전통가옥 윤경남 2006-07-25 561
50 韓國의 傳統家屋 寫眞 題目 윤경남 2006-07-25 499
49 반계 윤웅렬 별서 (서울시 문화재 지정내용) 윤웅렬 2006-07-13 643
48 윤보선전대통령 생가 및 주변문화재 정비 활용계획 윤문 2005-07-18 737
47 윤치소장로님 회고록 윤택선 2005-05-29 991
46 최초로 영어를 통역했던 윤치호 101_21.htm : DN:593 윤치호 2005-05-26 647
45 영결식/추도식 설교모음 (유경재목사님) [1] 2005-05-24 7505
44 이화 사위석 윤주영 2005-05-24 459
43 Flash법에 의한 구리제련 기술 (논문) 윤창구 2005-05-24 534
42 비뉴톤유체의 점도계적 흐름 (논문) 윤창구 2005-05-24 456
1234

이 홈피는 1024 X 768모드/FullSize로 최적화 돠었습니다.   당신의 윈도우 사이즈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