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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서

작성자 윤택선
작성일 2005-05-29 (일) 20:34
ㆍ추천: 0  ㆍ조회: 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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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소장로님 회고록
注; 이 글은 윤택선 장로 생전시에 부친이신 윤치소 장로에 대한 회고록을 작성 하였었는
데, 그 기록을 안동교회 담임 목사였던 유경재 목사(現 안동교회 원로 목사)께서 보관 하고
있었던 내용입니다.

구한국 군무 법무 양대신 윤웅열(尹雄烈)씨의 조카로 또 안성군수 강계부사를 역임하신 윤
영렬(尹英烈)씨의 차남으로 참판과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시고 나를 낳아주신 분이 바로 윤
치소 장로님이시다.
그분은 우리 형제들에게 붓글씨를 배우도록 주선해 주셨는데, 그 선생님은 바로 안동교회
장로님이신 이주완 장로님이셨다.
두 분은 바둑친구로서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같이 어울려 다니셨던 것 같다.
두 분이 말씀하시던 것을 엿들으면 홍수레골 김창제(金昶濟)씨 댁에서 조중완, 이주완 장석
윤 제씨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날이 안동교회의 창립주일이 되었다.
그런 뒤 현재 장소에 교회당을 짓고 난 뒤 두 분이 같은 해(1917년)에 장로로 장립되셨으니
정말 깊은 인연이라 할 수 있다.
우리 형제들은 (源善, 漢善, 나) 안동교회 유치원에 붓과 종이를 들고 가서 엎드려 글씨를 배
웠다. 그리고는 누가 얼굴이나 손에 먹을 제일 많이 묻혔나 서로 손가락질 해가며 웃었던 일
이 생각난다.
당시 우리 집은 위로 할아버지(윤영렬씨)와 할머니(정부인 청주 한씨)를 모시고 있었으며
백부님(尹致旿씨)과 또 사촌들(尹日善)이 합하여 30여명이나 한 집에 살고 있었다. 그 모든
사람들을 우리 아버지께서 부양하셨다.
안동교회 건물을 신축할 때 아버님께서 천원을 헌금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모두 입
을 딱 벌리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평소에 종이 한 장도 아껴 쓰셨으
며 편지지나 헌 봉투들이 그대로 버려지는 일이 결코 없었다. 헌 신문지는 물론 앞뒤가 새까
맣게 먹칠이 된 후에라야 버려지곤 하였다. 혹시 자녀들 중에 휴지 두 장을 한꺼번에 집어
서 쓰는 것을 보시면 당장 불호령을 내리셨다. 그러던 분이 천원이라는 거금을 헌금 하셨다
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안동예배당에 대한 향심은 극진하셨다. 주일 아침이면 일찍 감치 아침을 드신 뒤
에 마당에서 온 식구들을 재촉하셨다. 늦잠 자던 아들이나 모양을 내던 며느리들이 허겁지
겁 신을 신고 나서면 한 부대를 이끌고 아버지는 만족하신 듯 예배당으로 향하시곤 하였다.
그리고는 행여 어느 교인이 빠지지나 않았나 하고 맨 앞자리에 앉아 계속 고개를 돌려 뒤쪽
을 바라보곤 하셨다.
돌아가신 뒤 아버지께서 쓰셨던 사랑의 골방 속에서 성경주석책들이 한아름 쌓여있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말씀을 공부하셨구나 하고.
여름철만 되면 해마다 함경도 석왕사로 식구들을 끌고 피서를 가셨다. 거기서도 주일마다
우리 집 안방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거기는 아직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인
도하시는 예배에 참석하고자 아래 윗방이 가득 가득 차서 앉을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처
음에는 식구들끼리만 예배를 드렸으나 차차로 그 소문이 퍼지자 피서객으로 와있던 사람들
이 모인 것이다.
서울에서는 틈만 나면 뒷마당이나 앞마당에 피어있는 꽃들을 꺾어 아픈 교우들을 심방하셨
다. 특히 사돈 되시는 둘째 형님(浣善)의 장모님을 전도하셔서 그분이 확고한 믿음을 가지
고 돌아가실 때까지 주기도문을 외우며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주일만 되면 안국동 우리 집은 매번 큰 잔칫날 같았다. 교회에서 수고하는 성가대원들이나
제직 또는 목사님도 예배가 끝난 뒤에 점심이나 또는 저녁까지도 드시게 했고, 혹시 부흥회
라도 있으면 장소가 교회와 가까웠던 관계로 강사 목사님을 바깥 사랑채에 주무시게 하고
그 수발을 들어드리곤 하였다.
돌이켜 보면, 지금 우리에게 아무리 그만한 재물이 있더라도 교회를 받드는데 있어서 아버
지만큼 할 수는 없을 것만 같다. 그것은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셨던 마음과 하느님께서 거하
시는 성전을 받들고자 하는 믿음이 없이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노릇이
었을 것이다.
최거덕 목사님께서 새로 부임해 오시자 사례금을 전에 계셨던 교회보다 더 적게 드렸던 사
실을 아신 뒤 대번에 액수를 배로 올리기로 당회에 건의하셨다. 이유인즉 ‘목사님께서 돈이
있다고 놀음을 하실거냐 술을 잡수실 것이냐, 우리 교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실 것이 아니
냐, 목회자가 살림을 걱정하시게 되면 결국 교인들한테 그 영향이 온다’고 강력히 주장하셨
다는 것이다. 그런 장본인은 집안의 전기를 끄지 않거나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은 자손이 있
으면 당장 손수 잠그시는 분이셨다.
할아버지께서 강계부사로 임명되셨을 때의 일이다. 처음에 할아버지께서는 머나 먼 곳을 찾
아가실 엄두가 나지 않아 가시기를 꺼렸다는 것이다. 그때 아버님께서 떠나시기를 권고하시
며 드리는 부탁이 “아버님, 강계에 가신 뒤의 일체 비용은 서울 본가에서 보내드리겠으니 그
곳 관아의 공물은 전부 폐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부임 즉시, 부하로부터
공물 헌납자 명부를 인수하여 태워버리셨다. 그리하여 청렴정치의 본을 보여 지방민들이 극
구 칭찬하게 된 것도 다 아버님이신 윤장로님의 생각과 결단 때문이었다.
1942년 가을에 일본 당국에서 사람을 보내어 안동교회에 다니는 전문대학생들 명부를 보자
고 했을 때 목사님이 그 명부를 감추셨다. 그 때 아버지가 목사님께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독일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큰소리 탕탕 치더니 얼마 안 가서 망하지 않았습니까? 일본도
저렇게 우리를 들볶다가는 얼마 안 가서 망합니다.”
정말 아버지 말씀대로 일본도 그로부터 3년 뒤에 무조건 항복을 하고야 말았다.
돌아가시기 조금 전 몸이 편찮아 자리에 누워 계실 때 손자나 손녀들한테 신문 좀 읽어달라
고 하셨다. 그 때 일본 비행기가 적기 몇을 격추시켰고 일본 군대들이 어느 나라 상륙 작전
에 성공했고 등 그대로 읽어드리면 “듣기 싫다. 모두 거짓말인데 집어 치워라” 하고 큰소리
로 꾸짖으신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해방되기 1년 전(1944년 2월 20일)에 하늘 나라로 가셨다. 그러나 지금
도 하느님 곁에서 우리 온 식구들과 특히 몸바쳐 섬기고 사랑했던 안동교회를 위해 기도하
고 계시리라 굳게 믿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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