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의 개종과 재헌신 (국민일보 200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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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교회사] (125) 윤치호의 개종과 재헌신
[국민일보 2005-07-05 15:21]
초기 한국 감리교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평신도는 윤치호일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주한 미국공사관의 통역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기독교를 접할 기회를 가졌지만 신앙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중 개화파가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천하로 실패하자 윤치호는 상하이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상하이에서 윤치호는 미국 남감리교가 운영하는 중서서원에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이때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이 살해됐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실망한 그는 주색잡기에 빠져 방탕했으나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에게 기독교 신앙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무렵 중서학원의 본넬 선교사가 세례 받을 것을 권면하였다. 마침내 그는 1887년 4월3일 세례를 받았다. 다음은 그때 작성한 간증문의 일부이다.
“저는 상하이에 오기 전에는 상제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저는 성교(聖敎)를 알게 된 후에도 계속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1886년초부터 그해 말에 이르러 저는 지금껏 제가 추구하던 것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많은 악한 행실들을 떨쳐 버리려고 애를 썼고 꿀처럼 좋아했던 몇 가지 대표적인 죄를 없이 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습니다…저는 세례를 받고자 합니다. 저는 상제님이 사랑이심과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믿습니다.”
윤치호는 미국에 유학하여 5년 동안 신학을 공부한 뒤 조국에 돌아와서 조정에서 여러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1896년 윤치호는 민영환을 따라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였다가 돌아오는 길에 파리에서 몇 개월 동안 머무른 적이 있었다. 당시 세계 문화의 첨단에 서 있던 파리에서 그는 ‘눈부시고 황홀한 유혹’에 빠지게 되었고 이것이 그를 정신적으로 번민하게 만들었다.
얼마 후 그는 자신의 신앙을 다시 되찾게 되었고 더욱 철저하게 복음적인 삶을 살기로 결단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결단을 구체화하는 증거로 선교사와 스승에게 장문의 고해성사와 같은 편지를 보내고 용서를 구했다. 이렇게 해서 윤치호는 신앙의 재헌신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후 그는 한국 감리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원문 http://www.kmib.co.kr/html/kmview/2005/0705/0919852537231112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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