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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는 애국가를 짓지 않았다.애국가 안창호 작사설의 허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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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yunice
댓글 0건 조회 2,639회 작성일 15-07-0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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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는 애국가를 짓지 않았다.
애국가 안창호 작사설의 허구1.
신동립

도산(島山) 안창호(1878~1938)와 관련한 모든 것을 담은 책이 14권 분량의 ‘도산 안창호 전집’(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2000)이다. 그런데 안창호는 애국가를 작사한 적이 없다는 증거들이 이 전집에 들어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1913년 5월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흥사단 창립식에서 울려퍼진 노래가 현 애국가인지, 아니면 무궁화가(찬미가 제10장)인지를 책은 제대로 알려준다.

전집 제4부 활동 편에 ‘지사 안창호군 환영 예식절차’가 있다. 1910년 중국 청도에 도착, 동북 지역과 해삼위에서 활동하다가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왔을 때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회가 마련한 환영회의 절차를 적은 전단이다. 그날 환영회에서 두 번 불린 애국가의 가사는 ‘성자신손 오천년은 우리 국민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현 애국가가 아니다. 안창호가 1907년에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흥사단의 주장을 뒤집는 부분이다.

3년 전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노래 대신, 1897년 8월13일 조선개국 505회 경축식에서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맞춰 처음 불린 윤치호 작사 무궁화가를 부른 것이다. 이 팩트는 세 가지를 더 확인시켜 준다.

1911년 미주에서 ‘애국가’하면, 대개 무궁화가를 가리켰다. 현 애국가가 아니다. 무궁화가는 윤치호 작으로 이미 널리 퍼진 노래이므로 안창호와는 무관하다. 2년 후 샌프란시스코 흥사단 창립식에서 불린 노래는 애국가가 아닌 무궁화가라는 기존의 연구가 정확하다는 점이 새삼스럽다.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면, 중요한 이들 행사에서 무궁화가를 불렀을 까닭이 없다. 안창호는 무궁화가도, 현 애국가도 작사하지 않았다.

흥사단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지 10년이 지난 1923년 단우용 노래책이 나왔다. 1980년대 ‘도산여적(島山餘滴)’에 소개된, 음악사적으로 의미있는 자료다. 이 ‘Young Korean Academy Song Book’에는 ‘조상 나라 빛내려고’로 시작하는 안창호 작 입단가, ‘어두운 하늘 밝히고’로 시작하는 안창호 작 흥사단입단가, ‘단우들아 잊지말자’로 시작하는 춘원(春園) 이광수 작 ‘잊지말자’ 외 8곡, 총 11곡이 실려 있다. 그러나 현 애국가는 없다. 흥사단의 첫 노래책에 안창호가 작사한 다른 노래들은 있지만 현 애국가는 없다는 것, 애국가 안창호 작사설의 허구성은 거듭 입증된다.

‘시문편 노래 모음집’ 또한 주목대상이다. 전집 제1권에 수록된 안창호 관련 시가 모음이다. 태극학보, 서북학회월보, 대한매일신보, 신한민보, 그리고 수기(手記) 악보집 등에서 찾은 노래들을 편집했다. 안창호를 기리는 글들에 빠짐없이 등장하다시피 하는 ‘간다 간다 나는 간다’로 시작하는 거국가(거국행)는 물론, 이광수가 안창호 작사라고 분명하게 기록한 모란봉가(‘소년’ 1909년 4월호), 학도가 등을 담았다. 총 13편, 악보 3편으로 이뤄졌다. 이 의의있는 사료에서도 문제점들이 발견된다.

애국가가 두 편 나온다. ①1908년 태극학보 2월호 애국생(愛國生) 찬애국가 ②1910년 10월12일 신한민보 애국가다. ①의 애국생이 안창호, 무기명 ②가 안창호 작이라면 애국가 안창호 작사설의 발원은 바로 이것일 수 있다.

1910년 9월21일자 신한민보 ‘윤치호 국민가’(가사는 현 애국가)를 수록하지 않았다는 것도 의심해야 한다. 또 현 애국가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안창호는 애국가 작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집 편찬위원들이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안창호 작으로 공인된 시가를 모두 수록한 전집에서 현 애국가만 쏙 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거국가와 청년학우가’는 특히 잘 읽어야 한다. 1955년 4월19일 경향신문 기사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에서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 주장은 하나의 신화’라고 못박은 주요한이 썼기 때문이다. 흥사단의 기관지 격인 월간 ‘새벽’ 1955년 12월호에 게재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가 ‘윤치호 작사 확정 유보’를 결정한 해이므로 중요성은 배가될 수밖에 없다. 거국가와 청년학우가의 역사성을 살핀 글은 이렇게 전제부터 했다. ‘문교부에서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를 위촉하여 그 사무를 추진할 때에 필자도 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 위원회의 결론에 대해서 여기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고, 조사 도중에 딴 소득이 있기로 여기 피력하고자 하는 바 이다.’ 딴 소득이라니….

‘(윤치호가 설립한 개성 한영서원이 1930년대에 발행한 창가 200여편 모음집의) 제1장은 애국가(동해물과 백두산이)로 되었고, 제2장 역시 애국가(성자신손)로 되었다. 곡조는 두 가지가 같다’는 발견이다. 주요한은 안창호의 거국가를 애국가와 연관짓지 않았다.

‘도산 애국가사집’은 월간 ‘새벽’ 1956년 5~9월호에 실린 애국가 모음이다. 안창호가 작사한 거국행, 모란봉가 등 12편으로 돼있다. ‘부기(附記)’에서는 1950년대 흥사단의 양심이 감지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애국가 작사 시인으로서도 많은 가사를 남겼다. 이에 수록한 가사들은 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거주의 최희송 친지가 30년래 애장하여 오는 애국가집에서 추린 것들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도 도산 선생 작이 유력하나 문교부에서의 ‘작자미상’이라는 보류안에 의하여 여기서도 일단 보류하기로 하였다.’

최희송 소장자료에 ‘안창호 작’으로 표기된 애국가는 없었고, 이 노래집 편찬자는 안창호 작사를 확신하지 못해 문교부 보류안을 따른다고 했으며(문교부가 ‘작사자 미상’을 공식화한 기록은 없음),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근거를 찾아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인 바 없었다는 고백인 셈이다.

좌옹(佐翁) 윤치호(1865~1945)가 애국가를 작사했으니 안창호 작사 기록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작금의 흥사단은 50년 전과는 딴판이다. 설득력 있는 기록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간접증언을 사실자료라고 외칠 뿐이다.

‘도산 안창호 전집’에서 뽑아낸 자료 6건은 애국가 안창호 작사설은 곧 픽션임을 이렇게 명징하고 있다.

애국가 연구의 태두인 서지학자 김연갑은 “광복 후 김을한의 ‘좌옹 윤치호전’을 비롯한 전기류는 거의 모두 애국가 작사 사실을 당연시 해 기록했다. 가족과 친지와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서다. 이는 안창호 선생 가족들(1990년대 기록 이전)과 다른 현상인데, 1952년 미국 적십자사가 발행한 ‘국가’라는 책에서 딸이 정확하게 주장한 것과는 다르다. 이는 안창호의 측근, 그 중에서 부인과 아들은 안창호가 작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공감뉴시스편집부국장 reap@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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