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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애국가가사 떠올린적조차없다,애국가안창호작사설의 허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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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yunice
댓글 0건 조회 2,623회 작성일 15-07-06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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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애국가가사 떠올린적조차없다.
애국가안창호작사설의 허구2,
신 동 립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중 통감부 문서는 1894~1910년 일제가 조선인 주요인사들의 활동을 감시한 기록철이다. 이 가운데 1909년 헌병대 기밀보고서 제1330호는 ‘평양 대성학교 하계 휴업 개교식’ 상황을 조사, 보고한 것이다. 1908년 9월26일 주무인(主務人) 이종호•윤치호•안창호 3인 명의로 개교한 평양대성학교가 1년 뒤 여름방학을 시작한 날이다. 윤치호와 애국가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자료다.

‘1909년 6월13일 정오, 기자묘 아래 송산에서 열린 대성학교 학생들의 여름 휴업식 상황보고는 다음과 같다. 오후 0시 생도들이 애국가를 합창한 후 교장 윤치호가 생도들에게 훈화를 했다. … 생도들은 다시 애국가를 합창하고 6시반에 해산했다. 참관자는 600여명이었다.’

이 문건에 명기된 ‘애국가 합창’은 문헌으로 확인되는 거의 마지막 공식기록이다. 1년 뒤 병탄조약으로 애국가를 공개적으로 부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후 애국가 기록은 총독부의 사건기록으로만 존재하기에 이른다. 1910년 8월14일 도쿄 유학생회의 508회 조선개국 기원(紀元) 축하회를 감찰한 일제는 ‘김진용이 현행 국가를 폐지하고 윤치호가 작사한 국가를 부르자고 제안했다’고 기재했고, 조선일보는 하동 보통학교 학생 이두석이 공책에 애국가를 쓴 것이 발각돼 주재소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1923년 10월2일 보도했다.

1910년 일•한 병탄조약 이래 1945년 8월까지, 애국가를 부르고 듣고 적으려면 제재를 감수해야 했다. 애국가 제창 관련 기록을 미국이나 중국 상하이, 충칭에서만 찾을 수 있는 이유다. 국내에 좌옹(佐翁) 윤치호(1865~1945)가 작사한 애국가에 대한 기록이 있을 수 없었다. 대신 미주와 중국,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한 도산(島山) 안창호(1878~1938)는 자유롭게 기록될 수 있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미국 내 각급 회의와 행사에서 부르는 애국가를 접한 안창호는 애국가를 직접적으로 인식했다. 특히 흥사단과 대한국민회 등의 의식에서 불린 애국가는 안창호와 직결됐다.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윤치호에게는 친일시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광복을 보지 못하고 작고한 안창호는 도산선생기념사업회 등이 기렸다. 전기류를 발간하면서 애국가 작사자는 안창호일 수 있다는 식으로 기술했다. 포문은 1947년 5월에 나온 춘원(春園) 이광수(1892~1950) 저 ‘도산 안창호’다. 이광수는 ‘이 노래(애국가)는 원래 널리 불리워져 국가를 대신하게 되자 안창호는 그것을 자기의 작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애국가를 선생이 지으셨다는데’라고 물으면 안창호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인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서술했다.

훗날 ‘소이부답’(笑而不答)이라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표현으로 확산된 글이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 임시정부가 성립되면서 내무총장 안창호가 독립신문을 간행하자 이광수는 사장 겸 주필이 됐다. 이 같은 인연으로 이광수는 흥사단 원동부(遠東部) 조직의 첫 번째 단우가 됐다.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면, 이토록 두루뭉수리하게 기재할 수는 없는 관계다. 음악평론가 박은용이 1948년 10월6일 동아일보에 ‘이 주장은 오류’라고 못박은 것은 따라서 합당하다.

1955년 주한 미국대사관은 누가 애국가를 작사했느냐고 문교부에 문의했다. 당국은 ‘안창호 작사•안익태 작곡’이라고 답했다. 이 사실이 그해 4월2일 서울신문에 실리자 윤치호의 가족이 항의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작사자 조사위원회를 결성한 배경이다.

방대한 분량의 ‘도산 안창호 전집’(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2000)에서 안창호의 시문들을 분석하면, 안창호는 애국가 작사와 점점 멀어진다. 윤치호가 1907년 완성한 애국가는 자유시형이다. 안창호의 시문들은 전통적 가사체나 창가체다. 게다가 기독교적 내용도 없다. 1907년 직후 안창호의 대표작들은 상통하지 않는다. 기독교적 분위기가 전무하다는 점도 놓치면 안 된다.

◇단심가(안창호 작)

어야자야 어서 가자 모든 풍파 무릅쓰고. 문명계와 독립계로 어서 빨리 나아가자(서북학회 월보 1908년 2월)

◇평양 모란봉가(안창호 작)

금수산의 뭉친 영기 반공중에 우뚝 솟아. 모란봉이 되었고나 활발한 기상이 솟아난 듯(소년 1909년 4월)

◇거국가(안창호 작)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12일)

이들과 달리 무궁화가(찬미가 제10장)와 애국가(찬미가 제14장)는 상관성이 매우 높다.

◆Patriotic Hymn(뎨十) No[1] TUNE: AULD LANG SYNE(윤치호 작)

一 승장신손 천만년은 우리 황실이. 산고수려 동반도난 우리 본국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충군하는 일편단심 북악같이 높고. 애국하는 열심의기 동해같이 깊어.

三 이천만인 오직 한마음 나라 사랑하여. 사농공상 귀천없이 직분만 다하세.

四 우리나라 우리님군 황천이 도으사. 국민동락 만만세에 태평독립하세.

제4절 ‘우리나라 우리님군 황천이 도으사’는 다음의 제14장(애국가)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대한 만세’처럼 기독교적 찬미가임을 분명히 드러냈다. 윤치호는 ‘황천’을 일기에도 썼다. ‘일찍 일어나 황천(皇天)에 기도하고 우리 군부모(君父母; 임금과 부모)와 우리 친족, 우리나라 인민에게 복내릴 것을 축수’(윤치호일기 1887년 1월24일)했다. 조선왕조를 주권국가로 하는 동시에 충군애국 정신을 가진 국민을 창출해야 한다는 주제가 나타난다. 애국심이라는 국민정서와 의무를 연결시킨, 근대적 이상을 체계화한 작품이다.

◆Patriotic Hymn(뎨十四) TUNE: AULD LANG SYNE(윤치호 작)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남산 우헤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三 가을 하날 공활한대 구름 업시 높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四 이 긔상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을사늑약 체결 2년 후, 병탄조약 체결 3년 전인 1907년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절실한 구국기도의 시대였다. ‘한국교회가 지닌 가장 흥미 있는 양상의 하나는 애국심’이라고 짚은 초기 선교 보고서의 일절 그대로다. 1907년 일제가 YMCA의 어느 모임을 조사한 기록에는 기독교인들이 애국가를 구국의 기도와 함께 절절하게 노래한 사실도 들어있다.

‘애국가, 이 창가는 비애(悲哀)다. 그 뜻은 우리나라 삼천리 강토와 500년 종사를 천주(天主)에 빌어 독립을 빨리 회복해 주십사고 노래하는 것으로서, 듣기에도 눈물이 나도록 … 기도하고 폐회했다.’


윤치호의 위 두 작품에서는 충만한 기독교 신앙이 감지된다. 제10장에서는 ‘승(성)자 신손’ ‘무궁화’ ‘황천’, 14장에서는 ‘하나님’, ‘우리’, ‘대한’이 키워드다. 두 작품의 주제를 규정하는는 시어는 ‘하나님’이다. 맥락적으로 동일작가에 의한 동일 지향의 애국 찬미가라는 점을 입증하는 시어다. 1975년 문학평론가 임중빈은 ‘윤치호 작사의 애국가 가사 3(2)편이 찬미가에 모두 수록되어 있고, 문맥이 상통하는 점이 적지 않고 보면 애국가 작사자의 판정은 명약관화해진다’고 지적했다.

상통하는 시어는 더 있다. 제10장의 ‘우리 황실이요’ ‘우리 본국일세’ ‘우리나라 우리님군’, 14장의 ‘우리대한(나라) 만세’ ‘우리 기상일세’들이다. ‘우리’는 상투어다. 그런데 2편 모두에 자연스럽게 쓰였다. 공동체간의 연대성, 즉 신앙공동체를 반영한 것이다. 글이나 일상에서 스스럼없이 사용하고 있다. 동일인의 성향이 당연하게 반영된 셈이다. 윤치호에게는 이 말들이 상투어였다. 일기, 강연, 수업에서 빠뜨리지 않고 구사했다. 1898년 독립신문 기고, 독립협회 토론문에도 등장하는 말들이다.

①우리 대한 전국에 있는 1200만 동포형제가 일심일력으로 나라를 도와 우리나라도 지금 구라파에 있는상등국과 동등국으로 기억이 되기를 바라오며… ②우리나라와 우리 군주가 만국과 동등해야 하며 어느 나라에도 열등해서는 안 된다 ③우리 딸 문희의 말로는 자기가 다니는 학교의 상급반 학생은… ④우리나라와 우리 군주는 만국에 동등해야 한다. 우리 독립협회는… ⑤우리나라에 있는 전교사의 편지를 보니 우리나라 경성의 신교형제(信敎兄弟)가 이미 100여인이라 하니 반갑고 그 전교 신속한 일이 신기하다. 아무쪼록 하늘이 도와 우리나라 전교 거침없이 속히 성교국(聖敎國)이 되기를 비노라 ⑥우리나라 급무는 국민의 지식 문견을 넓히며 도덕 신의를 가르치며….

①과 ②는 독립신문 집필문, 나머지는 ‘윤치호 일기’에서 인용한 것이다. ‘우리’라는 단어가 매우 자연스럽다.

‘황천’과 ‘하나님’에도 주목해야 한다. 애국가 제1절에서 아주 직접적으로 나라를 만세토록 보호해달라고 기원하는 시어다. 이 시어를 쓴 것은 신앙생활이 곧 애국적 삶이라고 확신했다는 인식의 방증이다. 당시 윤치호가 아니면 쓰기 쉽지 않은 절대자의 호명이다. 아래 일기의 신앙고백에서 확인가능하다.

‘삶 속에서 실용되는 기독교는 그 앞에 어떤 것도 맞설 수 없다’, ‘내가 기독교를 택한 것은 기독교가 일을 해 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자기의 조국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충성과 양식을 다하여 드러내려 한다. 나는 한국 정부 안에 유일한 또 공개된 신자이다.’

자신의 신앙심을 표출했다. 바로 이 신앙으로 감히 14장에 ‘하나님’을 당당하게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조정의 관원으로서 군주의 나라를 하나님에게 보호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한 윤치호가, 신앙과 교육으로 깨우친 백성들이 위태롭기 그지없는 국권을 구하도록 해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황천)’을 가사에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윤치호와 동시대를 산 연세대 후임총장 백낙준은 ‘윤치호 애국가 작사고’에서 증언했다. ‘애국가에 빠짐없이 나오는 ‘황천’, ‘하나님’께 바치는 ‘도움’과 ‘보호’의 기원(祈願)은 기독교인 윤치호의 애국 염원이었던 것이다.’

국호 ‘대한’ 또한 특기해야 한다. 광무개혁으로 칭제건원(稱帝建元)한 것을 윤치호가 따른 것인데, 관료이기에 쓸 수 있는 시어다. 제10장과 14장 후렴 ‘대한사람 대한으로’, 14장 제1절 후행 ‘우리대한 만세’.

‘임군’ 역시 윤치호에게는 익숙하기만 하다. 이 극존칭 시어의 유래는 ‘윤치호 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400여일 동안 170여 차례나 고종을 배견(拜見)할만큼 왕과 친밀했던 윤치호의 존왕의식은 중국유학 초기부터 중요한 사상으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실제로 국왕과 가친의 사진을 걸어놓고 정초에 축복하기도 했다. 외무•학부 협판으로, 천안군수 등 외직칙임으로 임군을 자신의 애국적 노래에서 수식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필연이다. 임군은 1897년 대조선개국 505회 기원절 경축을 기념한 제10장, 1907년 제14장의 창작 동기에 일관되게 내재한 존왕의식이다. 제14장 4절 후행 ‘님군을 섬기며’, 제10장 4절 전행 ‘우리나라 우리 님군’.

제10장과 14장의 곡조와 후렴이 같다는 데서 형식적 응결성(cohesion)은 물론 내용의 응집성도 살폈다. 이를 통해 두 작품의 상호성을 파악, 동일작가의 작품임을 확인했다.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이지 안창호가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증명했다.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안창호)는 탁월한 지도자요, 사상가였다. 그는 학교다운 학교에 다닌 적이 없고, 안중근과 같은 수준의 한문 실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소시 때 기독교에 귀의한 적이 있으나 일찍이 성경의 어구를 인용한 일은 없었다. 그의 탁월한 식견과 신념은 모두 스스로 터득한 것이었다’고 강연했다.

애국가학의 태두인 서지학자 김연갑은 “애국가 안창호 작사설의 발화인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에는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특히 애국가 부분이 그러한데, 세 곳에서 언급하면서도 정작 제5장 ‘미주활동시대’(살아있는 태극기와 애국가)에서는 언급이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흥사단이 1996년 제3판 ‘도산 안창호’(이광수 지음)에서 원본에도 없는 언급을 했다는 사실이다. 애국가를 다룬 부분은 일정부분 이광수의 기술과 다르게 애초부터 수정, 가필됐으리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없다고 본다”고 판정했다.

공감뉴시스 편집부국장 reap@newsis.com 2015 07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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