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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는 친露파도 친美파도 친日파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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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yunice
댓글 0건 조회 2,157회 작성일 15-06-23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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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는 친露파도 친美파도 친日파도 아니었다
-윤치호 일기를 읽고-
캐나다 토론토에서, 友史 閔碩泓 2015.6.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尹斗壽의 8대손인 尹雄烈은 科擧에 급제 했는데도 기득권층의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으며 변방으로만 나도는 무관이었다. 그러나 그는 개화된 문명국에 눈을뜬다. 그의 출중한 아들 윤치호를 신사유람단원 어윤중의 수원으로 일본에 보내서 일본어와 영어를 배우게 하였다.
윤치호는60년 동안 영어로 일기를 적었다. 그의 생애는 복잡다단하다. 문명국의 제도를 본받아 개혁하려던 선각자의 시각으로 대한제국과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겪은 일들을소상하게 기록한 대하 드라마이다. 105인 사건 때 10년 치가 넘는 일기가 멸실된 것은 애석한 일이다.

일찍이 소년 윤치호는 초대 미국공사의 통역관으로 고종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국가 경영의 비젼을 보았다.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처벌을 받게 되었으나 고종의 특별한 배려로 해외 유학을 갈수 있었고, 상해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나 그에게는 축복인 반면에 정치적으로는 **衛正斥邪의 대세 아래에서 정적이 많아져 경계 대상이 되었다.
갑오개혁으로 윤치호 父子는 사면을 받고 10년만에 귀국하여 외부 협판이 되었으나 민비가 시해당하는 참사를 겪으며 언더우드집 으로 피신하는 지경에 이른다. 민영환 특사와 함께 러시아 황제 대관식 사절단원으로 다녀온다.
그 후에 독립협회 건으로 조정의 박해를 받으며 여러해 동안 귀양살이 같은 지방관리로 좌천을 당한다.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던 1904년에 그를 다시 불러들여 외부 협판에 기용한다. 제1차 한일의정서를 협상할 때의 절박한 이야기가 윤치호일기에 기록된다.
이하영 외부 대신이 병을 핑게삼아 자신은 빠지고 윤치호에게 떠넘겨 외부 대신 서리로 의정서에 서명하게 된다.

그 당시 조정 대신들은 윤치호를 겨우 며칠 동안만 외부대신 서리로 이용하여 희생양으로 삼은것이다. 이때 제일차 한일의정서에 서명한것으로 그를 친일파 라고 매도하는 빌미가 되었으나,내면의 실상은 밝히지 않은채 윤치호에게 덮어 씨웠다.

그 이듬해 1905년 乙巳조약 당일 새벽에는 인괘를 강탈 당하는 긴박했던 정황을 그의 영문일기에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1905.11월18일 일기) 그리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미국인 스티븐스 고문관은 그를 친일진영으로 끌어 드리려고 외부대신 서리직을 맡도록 집요하게 懷柔하였으나 윤치호는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거절하는 회신을 보낸다.

“(*1905.11월29일 일기)스티븐스씨,--외부대신 서리직을 맡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외부대신 직과 협판 직으로서 더 이상 할일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2. 나 는 굴욕감을 견딜 수 없으며, 우리 동포들에게도 미움을 받는 일입니다.
전에 말씀 드린 대로, 조선사람 이라면 아무도 이 조약에 서명 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 조약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일본은 그 노예 문서 같은 계약서에 도장 찍는 조선사람이 아니고는 성과를 거둘 수도 없고 거두지도 못할 것입니다.
3. 왜냐하면, 모멸감에 찬 내 동포들 앞에 나를 드러낼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사람이라면 황제의 말씀을 제쳐 놓고 일본이 약속 하는것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일본이 자칭 보호국으로서 조선사람들을 공평하고 정의롭고 관대한 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부정부패가 온나라를 뒤덮고 있습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개개인이 자신의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전쟁을 벌이고, 조선은 파멸에 이르고, 따라서 이들은 완전히 권력의 수중에 들게 될 겁니다.
우리의 구원자 이며 보호자임을 내세우는 일본은 틀림없이 현명한 자의 눈을 멀게 하는 그럴듯한 규정을 제정하겠지요! 이러한 무리 속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할것이라고 기대 합니까?...중략…
‘나는 우리 황제께서 통치 기반을 튼튼히 마련해 놓고 진정한 개혁을 하시지 않는 한, 어떤 직책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말씀을 드리는바 입니다.”(*윤치호일기 제6권, 윤경남 옮김)

조정대신들은 젊은 엘리트 윤치호를 각기 자기 진영에 끌어들여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했으나 입신양명이 보장된 그 출세의 길을 모두 거절한다.특히 이노우에 일본공사와 웨베르 러시아공사의 끈질긴 회유를 받았지만 오로지 나라의 자주와 굳건한 독립만을 추구했다. 본인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국제결혼, 지방색 파벌 타파, 그리스도인으로서 개혁과 신교육 실천을 위해 YMCA운동과 한영서원-송도학교 운영, 독립협회 주도, 독립신문 발간, 등에 앞장 선 자유평등 사상가에게 오랜 구습을 고집하는 기존 세력들은 그를 이방인 취급하고 경계하였다. 또한 그는 한국 개신교의 연합과 일치운동을 선도한 기독교계의 큰 지도자 였다. 개혁이념이 맞는 동지가 몇사람만 더 있었더라도 조선의 역사가 좀더 일찍 개명했으리라.

윤치호를 아끼고 개혁을 기대했던 이는 오로지 아버지 윤웅렬과 고종황제와 민비, 그리고 외국선교사들 뿐이었다.
그가 친러파도 친미파도 아니고 더구나 친일파는 될 수없는 인물임을 그의 일기를 통해 알 수있다. 조금도 가식이 없고 솔직하며. 가문과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도 숨기고 싶은 내용이 많지만, 그는 과거의 잘못들을 성자 어거스틴 처럼 참회한 이후에는 ‘한 점 부끄럼 없는 심정으로’교육과 선교사업에 헌신했다.
상해 망명 중에 세례를 받은 그는, “당금 우리나라 급무는 국민의 지식문견을 넓히며, 도덕 신의를 가르치며, 애국심을 기르는데 있으나, 정부가 그같이 더럽고 썩었으니 무슨나라를 위하여 장대한 道略이 있겠는가. 우리나라 교육을 도와 주며 인민의 기상을 회복시킬 기개는 예수교 밖에 없으니 내 나라를 위하여서나 내 한몸을 위해서나 聖敎에 온 몸의 심력을 다 들여 위로는 구세주의 공덕을 갚고 아래로는 내 영혼 행복을 온전히 하는것이 대망인 것이다.( 1886.10.22 상해)”라고 21세때 신앙을 고백한다.

순탄치 않은 그의 생애를 통하여 희망과 뜻을 펼쳐나가던 시기는 신사유람단원 으로 일본에 유학한 일, 미국공사관 통역관으로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던 시기, 상해와 미국 유학시절, 고학으로 저축한 돈을 선교기금으로 맡긴일, 마부인과 결혼한후 귀국하여 외부 협판으로 일할 때,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발간한 일, 덕원감리와 삼화감리를 역임한 일,남감리교를 한국에 설립한 일, 1907년에 애국가를 작사하고 한국 최초로 <찬미가>를 발간 보급한 일,송도학교를 설립한 일,YMCA 활동, 창문사를 설립하고 기독교 서적을 보급한일, 교파를 초월한 기독교 연합과 일치운동을 주도한일 등등이다.

반면에 좌절과 박해를 받던 시기는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아버지 윤웅렬은 귀양, 본인은 해외로 망명했을 때, 민비시해 사건, 고종을 구출하려는 춘생문 사건 실패로 아버지는 상해로, 본인은 언더우드집으로 피신했을 때, 러시아황제 대관식 사절단 에서 따돌림 당했을 때와 독립협회 건으로 탄압을 받고 원산으로 좌천 당했을 때, 한일의정서에 외부대신 서리로 서명을 강요 당했을 때, 사랑하는 마부인과 사별, 105인사건 주모자로 몰려 4년간 복역한 일, 그가 73세때인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조사를 받으면서 끈질긴 압력에 못견뎌 협력한일, 전쟁말기에 학도병 지원연설하여 친일파로 낙인찍힌 일 등이다.
개인의 榮達을 추구하거나 재물을 위해서 영합한 일은 한 번도 없었고, 일제에 협력할 때에도 돈을 받은일이 없으며, 오히려 선대로 물려받은 재산을 교육과 자선사업에 아낌없이 내놓았다.
그는 교회를 배교한일이 없고 신앙을 지켰다. 일본에 협력한것은 오로지 조국의 장래를 생각하며 교육과 YMCA활동을 계속하기 위한 고육지책 이었다. 학도병 지원 연설한 것이 사실 일지라도 평생을 조국을 지키며 고뇌에 찬 선각자의 업적에 비하면 미미한 과오에 불과하다.

따라서, 온갖 외적인 격동과 내면의 사상을 소상하게 加減없이 60년을 두고 적어놓은 그의 일기를 통해 그의 功過를 공정하게 평가하고, <윤치호는 친일파도 친미파도 친러파도 아니고, 오로지 국민계몽과 자유평등을 추구하면서 식민치하 에서도 교육과 자선사업을 실천한 우리나라 근대역사의 선각자였다는 사실>을 후손들이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이 <윤치호일기> 번역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끝.

**衛正斥邪위정척사: 조선 후기에 서학(西學)이 들어온 데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는 실학 운동이 활발해지고 천주교가 전파되자 주자학의 입장에서 이를 사도(邪道)로 보아 배척하고 국교로서의 유교를 수호하려는 운동이다.
보수 유생을 중심으로 처음에는 개항, 곧 외국과의 통상을 반대하다가, 후에는 항일 의병 운동으로 바뀌었다.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는 반외세 자주 운동이었지만, 지나치게 전통 사회 체제를 고수하려고 하여 시대의 흐름에서 뒤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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