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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봉사 활동에 앞장서는 윤상구 총재·양은선 부부 (레이디경향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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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747회 작성일 06-09-1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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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봉사 활동에 앞장서는 윤상구 총재·양은선 부부













민간 봉사 활동에 앞장서는 윤상구 총재·양은선 부부
[레이디경향 2006-08-14 12:12]







 



살면 살수록 멋과 맛이 느껴지는 한옥처럼 ‘나누는 삶’ 속에서 진짜 행복을 느낍니다!

전통과 문화유산보다 편리함과 편안함이 인정받는 세상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사라져가는 것을 아쉬워만 할 때 ‘지킴’이라는 것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윤보선 전 대통령의 장남 윤상구 총재와 양은선 부부. 옛것을 지키는 가운데에도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부부의 동행이 아름답다.

6백 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도시 서울을 대표하는 고택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 바로 윤보선 전 대통령의 고택(古宅)이다. 윤보선가(家)는 개화기 이후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한 집안으로 손꼽히는 명문가다. 조선시대 때 지은 한옥집에서 자자손손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윤보선가. 현재 이 고택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장남인 윤상구(57) 국제로터리 3650지구 총재 부부가 살고 있다.

예부터 집은 사람을 닮는다고 했다. 윤상구 총재와 양은선(52) 부부는 한옥의 정갈함과 기품을 그대로 빼닮은 모습으로 안국동 고택을 찾은 손님들을 반겼다. 장맛비가 아주 잠깐 한옥 지붕 너머로 자취를 감춘 사이 1백30~40년의 전통을 간직한 고택의 앞마당에선 자연스럽게 선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동서양의 조화를 이룬 부엌은 새로운 공간

사랑채에 부엌 없어 ‘철가방’ 신세 되기도

손숙(이하 손) 한옥을 어쩜 이렇게 깨끗하게 돌보셨어요? 이 집이 지은 지 1백30~40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윤상구(이하 윤) 저는 이 집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지금도 살고 있는데 오래된 고택임에도 우리집이 깨끗한 건 바로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인 거 같아요.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한옥은 사람이 사는지 아닌지에 따라 집이 많이 달라집니다. 우리집은 한 번도 빈 적이 없었기에 아직도 정갈한 한옥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같습니다.

손 아무래도 사모님께서 힘드시겠어요. 요즘 주부들은 아파트 생활에 익숙하기 때문에 단독 주택에만 살아도 손질할 것이 많다고 하던데, 하물며 한옥은 구석구석 쓸고 닦아야 하니 사모님께서 힘드실 테죠. 사모님이 아파트로 이사하자는 말씀 안 하시던가요?

윤 예전에 몇 번 했는데 지금은 한옥이 좋다고 해요. 현재 우리집은 문화재 사적지로 지정돼 있어서 집 수리를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외관은 물론이고 내부도 변경하거나 큰 수리를 하는 것이 힘든데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뒤 안채에 들어와 살면서 수리를 많이 했죠. 특히 아내가 주로 활동하는 부엌은 집안 골격을 흔들지 않으면서 서구식으로 개조했어요. 아내의 센스가 돋보이는 공간이죠. 약간 영국풍으로 인테리어된 우리집 부엌은 한옥에서 만나는 새로운 공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손 한옥은 집안에 안채와 사랑채 등으로 나뉘어 있어서 대가족이 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아요.

윤 한옥은 집이 아무리 커도 한 채당 방이 두 개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한 공간에서 대가족이 함께 살기는 힘들죠. 저희도 결혼 후에 사랑채에서 살았는데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온 가족이 한 방에서 살았어요. 현재 미국에서 인테리어를 공부하는 딸아이가 중학교에 다닐 때도 우리 가족은 한 방에서 살았어요. 그러다가 다락을 개조해서 딸 방을 꾸며줬죠. 우리 딸은 그때 처음으로 자기 방을 가졌어요.

손 그럼 사랑채에서 살 때 식사는 어떻게 하셨어요? 사랑채에도 부엌이 있나요?

윤 부엌은 안채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안채에서 음식을 해서 사랑채로 가져왔는데, 하루는 아내가 비가 오는 날 음식을 가져오는 게 너무 힘들다고 해서 고민을 하다가 제가 철가방을 사줬어요. 그래서 한동안 비오는 날마다 아내가 철가방을 들고 안채와 사랑채를 오갔죠.

손 그것 참 기발한 아이디어네요. 그래도 부인께서 큰 살림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윤 그렇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집엔 손님이 끊이는 날이 없었어요. 거의 매일 1백여 명의 사람이 집안에 들락거렸죠. 제가 결혼한 뒤에도 매일 손님이 많았어요. 그 많은 손님을 치러냈으니 아내가 힘들었죠.

손 그럼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부인께서는 첫 인상에도 ‘딱 이 댁 며느리다’ 싶을 만큼 이 집과 잘 어울리세요.

양은선(이하 양) 대학 다닐 때였는데 어느 날 교수님께서 부르시더라구요. 그래서 갔더니 누가 앉아 있더라구요. 당시 교수님이 제 아버님 친구분이셨는데 저를 참 아끼셨어요. 그래서 누가 있는 줄도 모르고 간 자리였는데 그게 맞선 자리더라구요. 그렇게 처음 만났어요.

윤 저는 사촌 형수 소개로 그 자리에 나갔어요. 그때 조건이 ‘서로 싫은 사람은 강요하지 말자’였어요. 근데 맞선 자리를 주선한 형수가 참 좋은 분이셨어요. 아버지, 어머니도 평소 그 형수를 아끼고 신뢰했기 때문에 아내를 만나기 전부터 우리집에서는 아내에 대해 이미 좋은 점수를 줬죠.

손 그러고 보니 두 분은 만나기 전부터 인연이셨네요. 그렇게 만나서 결혼한 후 바로 이 집에서 사셨나요?

양 아니에요. 결혼 후 2년 동안 미국에서 살았어요.

윤 제가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미국에서 다녔어요. 군복무를 하느라 잠시 귀국했고 제대 후 다시 미국으로 갔죠. 대학에서는 건축학을 전공했는데 졸업 후에는 와이셔츠를 만들어 파는 일을 했어요. 친구들끼리 모여서 같이 한 사업이었는데 8년 정도 했죠.

국제로터리 총재&아름다운 가게 이사인 부부

‘나누는 삶’이 진짜 가치 있는 삶이라 생각

손 그럼 현재는 어떤 일을 하시나요?

윤 현재는 건축자재와 관련된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간 봉사단체인 국제로터리 3650 지구의 총재로 활동 중이죠.

손 국제로터리 클럽은 어떤 단체인가요?

윤 친교와 봉사를 원뜻으로 하는 민간 봉사단체예요. 우리나라에만 1천3백여 개의 지구가 있고 서울에만 1백90여 개가 있죠. 그중 저는 ‘새한양’의 회원입니다.

손 얼마 전 몽골에 다녀오셨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국제로터리 활동과 관련이 있으신가요?

윤 물론이죠. 국제로터리에서 몽골에 방풍림을 세우기 위해 ‘5년 계획’을 세웠어요. 2년 전부터 시작했는데 작년에는 10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었죠. 근데 몽골에는 가축이 많아서 나무를 심은 뒤에도 가축들이 망가뜨리지 못하게 울타리를 쳐야 해요. 그리고 해마다 5월부터 10월까지는 나무에 물을 줘야 합니다. 그런데 몽골인들이 유목민이라서 우물을 만들어주고 일자리를 줘도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떠돌아다닙니다.

손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방풍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신다니 참 대단하십니다. 저도 ‘아름다운 가게’ 공동 대표로 활동하고 있지만 참 큰일을 하시네요.

윤 지난 5월에도 다녀왔는데 그때 함께 간 다른 지구의 총재께서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어요. 그 사고로 목 밑으로는 전혀 움직일 수 없는 하반신 마비 환자가 됐죠. 몽골에서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급히 서울로 와서 큰 수술을 하고 겨우 깨어났을 때 중환자실에서 만났는데 첫마디가 “윤 총재, 열심히 해주세요”라는 거였어요. 제가 어찌나 미안하고 고맙든지. 아무튼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래서 국제로터리 활동이 제 소명이라 생각하고 더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죠.

손 좋은 일 하다가 하반신 마비까지 되셨다니 참 마음이 아프네요. 부인께서도 ‘아름다운 가게’ 협동 이사로 활동하시는 등 봉사 활동에 관심이 많으시던데 혹시 시아버지 혹은 시어머니 영향을 받으셨나요?

양 저는 시어머니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사실 시어머니께서는 기독교 신자셨는데 교회 활동을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시아버지께서 ‘며느리는 좀 얌전하고 집안 살림만 할 사람’으로 삼고 싶으셨대요. 근데 제가 사회학과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조금 걱정하셨대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바깥 활동하느라 집안일에 소홀할까 걱정하신 거죠. 사실 결혼 후에 시어머니께서 봉사 활동 혹은 사회 활동하는 곳에 늘 저를 데리고 다니셨어요. 그때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손 부인께서 기억하실 때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양 두 분 모두 좋으셨어요. 특히 제가 무슨 일을 하든지 “잘했다”고 칭찬을 하셨지 한 번도 야단을 친 적이 없으세요. 학교만 다니다가 졸업하고 결혼한 제가 무슨 살림을 할 줄 알았겠어요. 서툰 제 모습을 보면서도 무조건 잘했다 칭찬해주신 게 제게 큰 힘이 된 것 같아요. 한 가지 집안에 손님이 너무 많이, 자주 오시기 때문에 제가 사생활을 가질 수 없다는 게 불만이었죠. 친구와 약속을 했더라도 아침에 “아버님이 오늘 무슨 일이 있으니까 준비해라”고 하면 개인 스케줄은 취소했으니까요.

윤 1980년에 결혼해서 바로 미국으로 떠났고 2년 반 만에 돌아와서는 계속 아버님, 어머님과 함께 살았으니까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죠. 특히 어머니는 저희와 7년 반 동안 함께 사셨는데 그중 3년은 치매를 앓으셨어요. 저야 바깥일이 있고 또 어머니가 여자다 보니 아내가 어머니 시중을 많이 들었죠.

손 부인께서 시어머니 수발을 다 드셨겠네요.

양 치매에 걸리신 시어머니는 아주 착한 아기가 되셨어요. 평소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을 가진 분이셨는데 그 모든 것이 다 보일 정도였어요. 시어머니께서 치매에 걸리기 전에 함께 성지순례를 갔는데 그때 계속 제 옷과 제 손을 잡고 “나 혼자 두고 가지 마라”면서 저를 꼭 잡고 다니셨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때부터 치매 기운이 있던 거 같아요.

손 시어머니 수발 들 때 제일 힘든 점은 어떤 거였어요?

양 특별히 힘든 것은 없었어요. 시어머니께서 당뇨가 있었는데 아이처럼 단것을 달라고 자꾸 떼를 쓰셔서 그걸 말리는 게 힘들었고, 가끔 다른 사람 말을 안 듣고 고집을 피울 때가 있으셨어요. 그때는 제가 “어머니 이게 이렇게 하시면 안 돼요” 하면 엄마 말 듣는 아기처럼 제 말을 들어주셨어요. 그리고 저희 친정아버지가 의사라 어려서부터 주사 놓는 것을 많이 보고 자라서인지 주사를 놓는 게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뇨를 앓는 시어머니께 아침마다 인슐린 주사를 놓아드렸어요. 그럼 시어머니께서 어느 날 손님이 오시면 “우리 며느리가 아침마다 좋은 주사를 놔줘서 내가 이렇게 좋아졌어요” 하면서 자랑하셨어요. 저는 시어머니 덕분에 별로 한 일도 없이 ‘효부’라고 칭찬을 들었죠. 그런 거 생각하면 제가 시어머니께 감사해요.

손 윤 총재의 모친 되시는 공덕귀 여사께서는 한국 여성사에 기록될 만큼 귀한 분이세요. 사회 봉사 활동도 많이 하셨고 어려운 사람들도 많이 도우셨죠.

치매 앓아 어린 아이된 시어머니 3년 동안 수발

시어머니 덕분에 ‘효부’ 소리 들은 것이 복이죠

양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함께 잤어요. 치매를 앓기 시작한 뒤 옛날에 시어머니를 모시던 침모께서 오셔서 함께 지냈어요. 그분이 워낙 잘해주셔서 밤에는 제가 편히 잘 수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같이 자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이부자리를 펴고 함께 잤는데 새벽녘에 저절로 눈이 떠져서 깼더니 시어머니께서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허공을 보고 계시더라구요. 그때 그 눈이 어찌나 맑은지… 너무 편안하고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눈빛이셨어요. 그렇게 함께 밤을 보내고 이틀 뒤 돌아가셨죠.

손 시어머니 돌아가신 뒤 어떠셨어요?

양 어머니 계실 때 많이 배웠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후회되더라구요. 그리고 어머니를 모신 것이 복이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손 시아버지 되시는 윤보선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시어머니만큼 애틋하진 않으시죠?

양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주 잠깐, ‘이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시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는 저희가 사랑채에서 살았기 때문에 안채의 구조를 잘 몰랐죠. 근데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아파트에서 한번 살아보려고 하다가 ‘그래도 안채에서 한번 살아봐야지’하는 마음에 안채로 살림살이를 옮겼어요. 그리고 이곳에서 살면서 시아버지가 현명하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분임을 깨달았어요. 시아버지께서는 한국적인 것은 살리면서 서양의 합리적인 생활 방식을 도입해 부엌과 거실 등을 개조하셨더라구요. 너무 놀랐어요.

윤 아버님은 신생활 운동의 창시자세요. 아침은 간단하게 먹고 점심은 분식을 하자는 주의셨고, 옷도 주름이 많이 가는 옷이나 손이 많이 가는 깃이 달린 옷은 지양하자고 주장하셨죠. 합리적인 분이셨어요.

양 그래도 세 끼 식사는 꼭 집에서 하셨어요. 저희 집은 외식을 1년에 한 번 정도 했어요. 참 엄격했어요.

윤 아내 말대로 아버님은 좀 무섭고 엄한 편이셨어요. 그리고 남자는 독립심이 있어야 한다며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셨죠.

손 윤보선 전 대통령께서 무섭고 엄한 편이셨다면 윤 총재께서는 어떤 교육관을 가진 아버지셨나요?

윤 저는 특별한 교육관을 가진 아버지는 아니었어요. 다만 우리 아들이 힘들어할 때 ‘아빠도 너랑 같이 힘들어해줄게’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 적은 있죠. 아들이 고교 3학년때 공부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더라구요. 근데 그걸 제가 대신 해줄 수도 없고 해서 마라톤을 시작했죠. 평소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던 제가 마라톤을 한다니까 다들 반신반의했는데 1년 만에 경주마라톤대회에 출전해서 완주했어요.

손 대단하시네요. 어느 아빠가 아들 힘든 것을 함께 느끼기 위해 마라톤을 할 수 있겠어요. 말로 내세우는 교육관보다 몸으로 자식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윤 총재께서는 ‘한국 내셔널트러스트’도 활동하시던데.

윤 한국 내셔널트러스트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이나 기부·증여를 통해 보존 가치가 있는 자연 자원과 문화 자산을 확보해 시민 주도로 영구히 보전·관리하는 시민 환경 운동입니다. 쉬운 예로 설명드리면 현재 저희 집처럼 오래된 한옥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함부로 개·보수를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옥이라는 게 손이 많이 가는 집이거든요. 비가 오면 기왓장부터 툇마루까지 꼼꼼히 잘 살펴야 하는데 혹시라도 한옥에 작은 흠이 생기면 어떻게 수리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저희끼리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필요한 정보를 서로 나누며 전통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손 윤 총재께서는 개인 사업체도 열심히 운영하시지만 민간, 봉사 단체 활동에 더 큰 열의를 보이시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국제로터리와 한국 내셔널트러스트 등 좋은 사회 활동 부탁드립니다. 부인께서도 ‘아름다운 가게’ 등에서 계속 활동하실 거죠?

양 그럼요. 주변 사람들과 나누며 사는 것이 기한을 정해놓고 하는 건 아니니까 앞으로도 할 수 있을 때까지 서로 나누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윤상구 프로필

1949년 서울 출생. 지난 66년 미국으로 건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5년 뉴욕 주 시라큐스 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76년부터 8년 동안 LA에서 의류업에 종사했다. 83년 귀국해 건축자재 수입 판매업체인 (주)동서코포레이션을 설립했다. 현재 국제로터리 3650의 총재로 활동 중이며 ‘한국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위원회’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부인 양은선씨와는 지난 80년 결혼했으며 1남 1녀를 뒀다.

1·2·3·4 서울 북촌 중심부에 자리한 윤보선가는 부정형의 대지에 안채, 사랑채, 산정채, 별당채, 행랑채, 대문채, 기타 부속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5·6 영국풍이 묻어나는 주방은 한옥의 틀을 깨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양은선씨가 직접 개조했다. 7 윤보선 전 대통령이 살아 생전 생활하던 거실은 동서양의 조화가 잘 이뤄져 있다.

1 양은선씨의 주 활동 무대인 부엌 입구에 장식된 가족 사진과 어린 날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 2 1백3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한옥 구석구석에는 옛 선조들의 물건이 곳곳에 숨어 있다. 3 윤 총재의 3대 조부모 사진. 원래 흑백 사진이던 것에 컬러를 입힌 것이라고 한다.

4 윤상구 총재의 아들 일영씨와 윤보선 전 대통령이 함께한 사진. 5·6 윤보선 전 대통령 내외와 윤상구 총재의 가족 사진에는 윤보선가 3대가 모였다.

에필로그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에도 장맛비는 모습을 감춘 채였다. 잔뜩 찌푸린 하늘을 떠받친 한옥 지붕이 어찌나 위풍당당한지. 흐린 날은 그대로의 맛이 있고 쨍하게 맑은 날은 또 그 나름대로의 정갈한 멋이 드러나는 한옥. 윤상구 총재와 양은선 부부는 1백 30년을 넘게 살아온 한옥의 맛과 멋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이었다.

글 / 경영오 기자 사진 / 민영주(Aye 스튜디오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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