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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3. 7. 5 윤일선박사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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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901회 작성일 23-07-05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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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3/07/05/LFLVW42EKBDTPFI264PENPPSJU/

미래에서 온 과학자들
윤일선(1896~1987)은 과학자며 의학자다. 대한제국 학부국장 윤치오의 아들이다. 개화기 지식인 윤치호가 5촌 당숙이고 윤보선이 4촌이다.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어릴 적 조선에 돌아온 뒤 교토제국대 의대를 졸업했다. 1929년 경성제대 병리학교실 조교수로 있으면서 교토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많은 조선인 제자를 길렀다. 그 가운데에는 훗날 정읍 구마모토농장 주치의로 일하다 대한민국 농촌 보건의 선구자가 된 ‘조선인이 가르친 조선인 박사 1호’ 이영춘도 있었다.

1937년 윤일선은 윤치호가 준 돈 5000원과 세브란스 예산 3000원으로 미국과 유럽 병리학계를 견학했다. 윤일선은 미국 버클리에 있는 ‘어네스트-로렌스 연구실’ 풍경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중성자가속장치 사이클로트론 앞에서 윤일선은 ‘이 방사선 가속기가 의학 발전에 기여하겠다’라고 생각했다.(윤일선, ‘나의 학문편력’, 1987년 5월 4일 ‘매일경제’)

윤일선은 해방 후 서울대 총장과 원자력원장과 학술원 회장과 원자력병원장을 두루 맡으며 대한민국 원자력계를 설계했다. 1948년에는 미국 프린스턴대 원자연구소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나기도 했다.(1948년 6월 16일 ‘조선일보’) 윤일선이 아쉬워했던 중성자가속기의 꿈은 근 50년이 지난 1986년 당시 원자력병원장인 아들 윤택구가 스웨덴제 사이클로트론 가속기를 도입하며 이뤄졌다. 윤일선은 그 이듬해 죽었다.

윤일선처럼, 국가가 없거나 국가 지원이 없었음에도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해방 후 가난한 시대, 이들은 ‘토요일마다 군복을 입고 적선동 문교부 가건물에서 세미나를 하는’ 원자력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다. 1955년 만들어진 이 스터디 그룹 멤버 하나하나가 대한민국 원자력과 과학기술의 아버지들이다. 서울대 교수를 때려치우고 원자력과 과장이 된 윤세원이 가져온 서적 ‘연구용 원자로’가 첫 교재였다. 6·25전쟁 중 대북첩보부대인 켈로부대에서 활동했던 서울공대 졸업생 이창건도 멤버였다. 경무대로 배달된 미국 원자력 관련 많은 문건은 ‘타자 실력과 영문 작성 능력이 뛰어난’ 이창건이 맡아서 처리했다.(‘한국원자력연구소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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