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선 연주회 사진
페이지 정보
본문
10/22 윤기선 연주회 사진입니다.
(예술의 전당)
아울러 한인하상 수상축하드립니다.
(관련기사)
**********************************
한인하-윤기선 두 원로 피아니스트 ‘건반위의 황혼’
[동아일보 2005.10.27 03:00:50]
[동아일보]《“후배가 85세의 나이에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협주곡을 완주했다니 대단합니다. 그의 끊임없는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원로 피아니스트 한인하(韓仁河·90) 씨가 26일 ‘한인하 피아노상’ 제3회 수상자로 재미 피아니스트 윤기선(尹琦善·85) 씨를 선정했다. 상금 1000만 원의 이 상은 한 씨가 국내 피아노 연주와 교육 부문 공로자에게 주기 위해 제정한 것으로 1회 백건우, 2회 한동일 씨가 수상했다. 》윤기선 씨는 19, 22일 경기 수원시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공연장과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수원시립교향악단과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 윤 씨는 광복 전후 베토벤 협주곡 ‘황제’ 등을 국내 초연하며 화제를 모았던 스타 피아니스트. 1948년 이후 미국에 머물며 하트퍼드대 교수 등을 지낸 윤 씨는 10년 만에 귀국 공연을 가졌다.
두 원로 피아니스트의 인연은 6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개화파 정치가 윤치호(尹致昊)의 아들인 윤 씨는 1938년 일본 도쿄예술대(옛 우에노 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한 씨는 이 학교의 대학원생.
그러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것은 최근 한 씨가 수상자 선정 소식을 알리기 위해 미국의 윤 씨에게 전화를 한 것이 처음이었다. 한 씨는 “그땐 한국 학생이라곤 우리 둘뿐이었는데도 수줍어서 말 한마디 못했다”며 “기선이는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그냥 ‘네, 네’만 하더라고…”라며 웃었다.
한 씨는 일제강점기 화신백화점을 창업해 한때 ‘조선 제일 갑부’로 불렸던 고 박흥식(朴興植) 화신그룹 회장의 부인이다. 광복 후 서울대 음대 교수, 경희대 음대 기악과장 등을 지내며 후진을 양성했다. 그러나 1994년 박 회장이 별세했고, 자신은 사고로 다리를 다쳐 지금은 휠체어 없이는 거동할 수 없는 형편이다. 한 씨는 “외동딸이 미국에 있어 10년 넘게 병원에서 홀로 살고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한 씨의 최근 삶은 나눔의 연속이다. 그는 2000년 동아일보사에 1억 원을 기탁해 그 이자로 동아음악콩쿠르 피아노 부문 1등 수상자에게 상금을 주도록 했다. 같은 해 경희대에 발전기금 1억 원을 냈으며 올해 1월에는 홍칠나전장(紅漆螺鈿欌) 등 고가구 25점과 1억 원을 숙명여대 박물관에 기증했다.
“얼마 전 TV로 나훈아 씨의 노래를 들었는데, ‘100년도 힘든 것을 1000년을 살 것처럼…’이라는 가사가 그렇게 마음에 와 닿더군요. 요즘엔 목걸이며 반지며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전부 남에게 나눠 주는 기쁨에 살아요.”24일 인터뷰 장소에 나타난 한 씨는 휠체어를 탔지만 흰 망사 장갑까지 낀 귀부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진 촬영은 한사코 거부하며 “꼭 신문에 내야겠거든 30대 초반에 찍은 예쁜 사진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상을 받은 윤 씨는 “연주회를 끝낸 뒤 정말 행복하면서도 이게 마지막인가 싶었다”며 “도쿄예술대 선배로서 광복 전후에 미인 피아니스트로 인기가 높았던 분이 이런 큰 상을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예술의 전당)
아울러 한인하상 수상축하드립니다.
(관련기사)
**********************************
한인하-윤기선 두 원로 피아니스트 ‘건반위의 황혼’
[동아일보 2005.10.27 03:00:50]
[동아일보]《“후배가 85세의 나이에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협주곡을 완주했다니 대단합니다. 그의 끊임없는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원로 피아니스트 한인하(韓仁河·90) 씨가 26일 ‘한인하 피아노상’ 제3회 수상자로 재미 피아니스트 윤기선(尹琦善·85) 씨를 선정했다. 상금 1000만 원의 이 상은 한 씨가 국내 피아노 연주와 교육 부문 공로자에게 주기 위해 제정한 것으로 1회 백건우, 2회 한동일 씨가 수상했다. 》윤기선 씨는 19, 22일 경기 수원시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공연장과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수원시립교향악단과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 윤 씨는 광복 전후 베토벤 협주곡 ‘황제’ 등을 국내 초연하며 화제를 모았던 스타 피아니스트. 1948년 이후 미국에 머물며 하트퍼드대 교수 등을 지낸 윤 씨는 10년 만에 귀국 공연을 가졌다.
두 원로 피아니스트의 인연은 6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개화파 정치가 윤치호(尹致昊)의 아들인 윤 씨는 1938년 일본 도쿄예술대(옛 우에노 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한 씨는 이 학교의 대학원생.
그러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것은 최근 한 씨가 수상자 선정 소식을 알리기 위해 미국의 윤 씨에게 전화를 한 것이 처음이었다. 한 씨는 “그땐 한국 학생이라곤 우리 둘뿐이었는데도 수줍어서 말 한마디 못했다”며 “기선이는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그냥 ‘네, 네’만 하더라고…”라며 웃었다.
한 씨는 일제강점기 화신백화점을 창업해 한때 ‘조선 제일 갑부’로 불렸던 고 박흥식(朴興植) 화신그룹 회장의 부인이다. 광복 후 서울대 음대 교수, 경희대 음대 기악과장 등을 지내며 후진을 양성했다. 그러나 1994년 박 회장이 별세했고, 자신은 사고로 다리를 다쳐 지금은 휠체어 없이는 거동할 수 없는 형편이다. 한 씨는 “외동딸이 미국에 있어 10년 넘게 병원에서 홀로 살고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한 씨의 최근 삶은 나눔의 연속이다. 그는 2000년 동아일보사에 1억 원을 기탁해 그 이자로 동아음악콩쿠르 피아노 부문 1등 수상자에게 상금을 주도록 했다. 같은 해 경희대에 발전기금 1억 원을 냈으며 올해 1월에는 홍칠나전장(紅漆螺鈿欌) 등 고가구 25점과 1억 원을 숙명여대 박물관에 기증했다.
“얼마 전 TV로 나훈아 씨의 노래를 들었는데, ‘100년도 힘든 것을 1000년을 살 것처럼…’이라는 가사가 그렇게 마음에 와 닿더군요. 요즘엔 목걸이며 반지며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전부 남에게 나눠 주는 기쁨에 살아요.”24일 인터뷰 장소에 나타난 한 씨는 휠체어를 탔지만 흰 망사 장갑까지 낀 귀부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진 촬영은 한사코 거부하며 “꼭 신문에 내야겠거든 30대 초반에 찍은 예쁜 사진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상을 받은 윤 씨는 “연주회를 끝낸 뒤 정말 행복하면서도 이게 마지막인가 싶었다”며 “도쿄예술대 선배로서 광복 전후에 미인 피아니스트로 인기가 높았던 분이 이런 큰 상을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 이전글방문자수 20,000회 05.10.28
- 다음글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심각한 역사왜곡 05.07.2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