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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누가 보든 난 '금수저'일 테니..."_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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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위기념사업회
댓글 0건 조회 3,293회 작성일 16-05-24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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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누가 보든 난 '금수저'일 테니… 그냥 좋은 일 좀 하고 싶은 것"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 2016.05.23 03:00

['국제로타리 세계대회' 개최… '윤보선 前 대통령 장남' 윤상구씨]

尹潽善 '가족장' 유언 남겨
"죽고 난 뒤까지 나라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
정부 상대 행정소송도 안 해

"아버지는 '정원사'로 자처… 20년간 집안에서 정치를 해
유세 때 집 비우는 것 말고 거의 바깥출입을 안 해"

윤보선 전 대통령 사진
윤보선 전 대통령.

서울 안국동에 있는 '윤보선 고택(古宅)'에서 윤상구(67)씨를 만났다. 그 까닭은 그가 이 고택의 주인이고 거기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윤보선 전 대통령(1960~1962년 재임)의 장남이다. 이번 인터뷰의 목적은 행사 홍보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2016년 국제로타리(Rot ary) 세계대회' 조직위원장이다. 이 대회는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 전시장에서 열린다. 세계 160여 개국에서 오는 2만3000명을 포함해, 모두 5만여 명이 한자리에 집결한다.

"로타리 조직 본부에서 잡아놓은 숙소 객실만 8000여 개다. 셔틀버스 800대가 외국 회원들이 묵는 호텔들과 행사장을 오간다. 이들은 자기 시간을 내서 오고 등록비와 숙박비를 내고 밥을 사먹으면서 '지구촌 평화를 위한 봉사'를 위해 닷새간 강연 듣고 토론하게 된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아들이 정치나 민주화운동이 아닌 '로타리' 활동을 하고, 그의 직업이 건축자재 수입업체 대표라는 게 흥미로웠다.

"미국에서 귀국해 사업한다고 왔다 갔다 했지만 국내에 연줄이 없었다. 사람들을 사귀기 위해 1987년 '로타리'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뭘 하는지 모르고 들어갔다."

―주위에서 '정치에는 관심 없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을 텐데?

"내가 누구 아들이라고 밝힌 적이 없어, 나와 아버지를 연결짓지 못했다. 아마 알았으면 '왜 저 친구는 비실비실할까'라고 궁금했겠지(웃음)."

―집안에서는 장남에 대해 그런 기대가 없었나?

"전혀. 내가 정치를 하겠다고 했으면 아마 아버지가 말렸을 것이다. 아버지는 오십이 넘어 나를 봤으니, 손자 같은 아들이었다. 그저 내가 얼른 자라서 독립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윤보선 고택은 서울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양반 가옥이며 사적 제438호 문화재다. 고대광실(高臺廣室)이 이렇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널따란 응접실에는 15분마다 자명종이 댕그랑거렸다.

―이런 부(富)를 언제 축적한 건가?

"할아버지 대(代)에서 축적이 됐다. 할아버지는 방적기 수십 대를 들여와 광목 노끈을 만든 국내 최초 공장인 '경성직류'의 초대 사장이었다. 전국에 부동산도 많았다. 대신 아버지는 평생 돈을 쓰기만 했을 뿐 번 적이 없었다. 그게 미안했는지 어린 내게 '돈 벌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나 그럴 수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박정희 정부 측 인사가 '반독재투쟁' 하는 아버지를 달래려고 '강남 개발이 되니까 땅을 사두라. 돈을 빌려주겠다'는 제의를 해왔다는 것이다."

―집안에서 정치인들을 보면서 성장하지 않았나?

"아버지는 스스로 '가드너(정원사)'라고 했다. 집안에서 정원 손질을 하면서 20여 년간 정치를 했다. 선거 유세 나갈 때 잠깐 집을 비우는 것 말고는 일 년 열두 달 바깥출입을 한 적이 없다. 야당(한민당) 당사가 워낙 협소해 모든 회의를 우리 집에서 했다. 회의 내용을 구술하면 당시 받아 적던 젊은 대변인이 김영삼이었다. 그 시절 야당 정치인들은 생활이 어려워 삼시 세끼를 여기서 해결했다. 대문간에는 출입기자들이 북적댔다. 이만섭 동아일보 기자(전 국회의장)는 키가 크고 삐쩍 말라 기억에 남아있다."

윤상구 위원장은 “당시 아버지가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말할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고 말했다.
윤상구 위원장은 “당시 아버지가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말할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고 말했다. /조인원 기자
―4·19 직후 내각제에서 총리는 장면 박사였고 대통령은 윤보선이었다. 청와대 시절을 기억하나?

"열두 살이었으니 물론이다. 그때만 해도 청와대라는 게 형편없었다. 경찰 30명이 지켰다. 아버지의 운전기사가 경호실장이었다."

―윤보선은 대통령 취임 후 자신에게 '각하' 명칭을 쓰지 말도록 하고, 살아있는 자신의 얼굴이 도안된 우표 발행을 거부했다는데?

"그랬던 걸로 알고 있다."

―당시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서 유학했기 때문에 그랬을까?

"그 영향도 있었을 거다. 아버지는 선거에 나가 '나라가 이 모양이니 어떻게 바꿔야 한다'고 유세했지, '나를 찍어달라'며 표를 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가 내게 '서울 종로 합동연설회에서 같이 출마한 친구 이인(李仁·초대 법무장관)을 흥분해서 헐뜯었는데 그 일이 평생 한(恨)으로 남았다'며 털어놓은 적이 있다."

―5·16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남아있나?

"새벽에 총소리가 들려 깼다. 그때는 청와대에서 시내가 다 보였다. 멀리서 섬광(閃光)이 번쩍번쩍거렸다. 괴뢰군이 쳐들어왔나 생각했다. 좀 시간이 지나서 '청와대로 쿠데타군이 온다'는 말을 들었다. 지프에서 장도영·박정희 장군이 함께 내렸다. 박정희는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들이 현관에서 총을 풀고 안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기억난다."

―윤보선은 '영국 신사' 별명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양반의 권위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는 평이 있었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군 출신인 박정희는 자신을 '개혁 세력'으로, 윤보선을 '유교봉건 세력'으로 공격했는데?

"옛날 사람 치고 권위주의적이지 않은 분이 있었을까. 김영삼·김대중씨에 대해서도 1980년 초 타임지(誌)는 '이들은 민주주의 투쟁을 해왔지만 권위주의적(aut horitarian)이다. 한 번도 민주주의하에 살아본 적이 없다'라고 썼다. 사안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데 놀랐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15만표 차이로 낙선한 뒤 '나는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말했는데?

"당시 부정 투·개표로 아버지가 떨어졌다고 확신한다. 만약 당선되면 다음 날 아버지를 저격할 것이라는 설이 돌았다. 아버지가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말할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고 본다."

―박정희 정권 시절 윤보선은 '반(反)독재투쟁'의 구심점 역할을 했는데, 아들로서 이해가 됐나?

"경찰이나 정보부 사람들이 안팎으로 우리 집을 감시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정의로운 일을 하신다고 생각했다."

―박정희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알다시피 산업 발전과 근대화를 이룬 공(功)이 있고, 반면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잘못한 부분이 있다."

―객관적인 평가인데?

"내가 안 그럴 이유가 있는가."

―집안의 영향을 받으면 그렇게 객관적 입장이 되기 어렵지 않은가?

"내가 만약에 국내에 계속 살았으면 원치 않아도 정치를 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박해를 계속 받으면 반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춘기 때 국내와 떨어져 미국에서 지냈다. 당시 미국에서는 '히피 문화'가 유행했다. 그런 영향도 받았다. 돈 많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게 인생의 가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치에 대한 관심에서도 멀어지게 됐다."

그는 고교 2학년인 1966년에 미국 유학을 갔다. 뉴욕주 소재 시러큐스대 건축학과에 다니다가 귀국해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나갔다. 졸업 후 귀국을 앞두고 있을 때 한 국 내 건설업체에서 입사 요청이 왔다.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는데 그 업체의 회장이 직접 찾아와서 지나치게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다른 이유가 개입된 것 같았다. 그래서 입사는 물론이고 귀국도 포기하고 미국에 남게 됐다."

그는 5공(共) 시절인 1983년 귀국해 전공을 살려 건축자재 수입회사를 차렸다.

윤상구 위원장과 최보식 선임기자 사진
―윤보선은 5공 정권과는 협력관계가 됐는데?

"아버지는 1980년 2월 양김(兩金)씨를 집으로 불러 단일화를 설득하다 실패하자 정계를 은퇴했다. 그 뒤 5공이 들어서자 박정희 정권과는 뭔가 달라지지 않겠나 기대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집으로 아버지를 찾아와 잘하겠다고 말했고."

―이 때문에 재야나 학생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말을 들었는데?

"어머니(공덕귀)는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남들이 비난한다.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말렸지만, 아버지는 '잘하겠다고 말해 잘하라고 말한 것뿐'이라고 했다. 5공에서 국정자문위원에 임명됐지만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다. 만약 혜택을 받았다면 그건 사업하는 내가 받았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1990년 윤보선은 93세로 돌아가시기 전, 독재자(박정희)가 누워있는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걸 반대했다는데? 그래서 가족장을 치렀나?

"그건 아니다. 아버지는 내게 '죽고 난 뒤까지 나라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며 가족장 유언을 남겼다. 당시 총무처 장관이 찾아와 '국장은 아니더라도 정부장(政府葬)을 허락하면 준비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고인의 뜻이 아니다'라고 했다. 다음 날 우리 집안 어른과 다시 찾아왔지만 가족장으로 치렀다. 아버지는 살면서 한 번도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빼앗긴 재산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옛날 정치인은 나름대로 품격이나 철학이 있었던 것 같다.

"옳고 그른 것을 떠나 요즘처럼 정치로 밥을 먹고 살려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머니인 공덕귀 여사(1997년 별세)는 여성운동가였는데?

"평생 교회의 전도사로 살고 싶어 했던 분이다. 1980년 아버지가 정치를 그만두자, 어머니는 구속자가족협의회 의장, 양심범가족협의회 회장 등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바깥 활동을 했다."

―부모님은 그렇고, 본인은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했는데?

"굴곡이 많은 인생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인터뷰는 '로타리 세계대회' 홍보를 위한 것인데, 내가 욕먹겠다."

―어떻게 홍보를 해주면 되나?

"민간단체에서 개최한 국제회의로는 최대 규모다. 유커(중국 관광객) 8000명이 한강공원에서 삼계탕 파티를 한 게 큰 뉴스가 됐지만, 그건 이번 대회와 비교도 안 된다. 5만명이 모이니 '평화(平和 )의 도시'가 하나 생기는 것과 같지 않겠나."

인터뷰 뒤 그는 고택을 안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러 가지로 감사할 게 많은 사람이다. 젊은 날 내가 고생을 했던들 얼마나 했겠나. 누가 보든 '금수저를 입에 물고 살아온 사람'이지 않겠나. 그래서 우리 사회에 빚을 갚는다는 식으로 거창하게 말하려는 게 아니고, 그냥 좋은 일을 좀 하고 싶은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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