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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목사 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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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460회 작성일 15-07-27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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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무궁화꽃 Rose of Sharon

김대억목사 특별기고,

윤경남 역서- 윤치호 일기 제4권에 나타난 역사의 흐름-을 읽고  2015-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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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건이나 사물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문학작품이나 국전에 출품된 그림들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갈라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된다. 인물을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좌옹 윤치호 선생(1865-1945)이 한국 근대사에 미친 영향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우리 민족이 걸어온 격동기에 윤치호 선생이 민족 지도자 중의 한 분이었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줄 안다. 윤치호 선생은 대한제국 말기에 정치인으로 또 외교관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며, 언론과 교육 분야와 민권운동과 기독교운동에도 크게 이바지한 인물 중의 한 분이다. 윤치호 선생이 한 많은 일들 중 우리들의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가 1883년부터 1943년까지 60년에 걸쳐 일기를 썼다는 사실이다. 18세에 시작하여 78세까지 계속하여 쓴 그의 일기 속엔 근대 한국사를 연구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역사적 자료들이 많이 담겨져 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난중일기엔 이순신 장군의 사생활 외에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을 물리친 상세한 내용은 물론 그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과 더불어 조선군과 일본군이 사용한 군사작전에 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중일기”와 “윤치호 일기”를 같은 성격의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을 줄 안다. “난중일기”가 1592년에 발발하여 7년간 계속된 임진왜란을 바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사료들을 내포하고 있는 반면 “윤치호 일기” 속엔 1883년에서 1945년까지의 한국 근대사의 발차취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윤치호 일기”는 1883년 1월 1일부터 1887년 11월 24일까지는 한문으로, 1887년 11월 25일에서 1889년 12월 6일까지는 한글로, 그 후 1943년 12월 7일까지는 영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60년에 걸쳐 3개 국어로 기록된 “윤치호 일기”는 그 분량도 엄청나서 1883년 10월 19일부터 1906년 7월 3일까지의 것만도 대학노트 30권이 넘는다고 한다. 이 방대한 분량의 일기 중 윤경남 여사가 역술한 “윤치호 일기 제4권(1895년)에 나타난 역사의 흐름”에는 제목에 명시되어 있듯이 1895년 1년분만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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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 민영환

제목만 보아도 이 책엔 자연인 윤치호 선생의 삶의 기록을 뛰어넘어 1895년에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며 남긴 흔적들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매달 그 달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과 거기 관련된 인물들을 나열하고, 그들에 관해 간략하게 기술한 것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역술자의 자상하면서 사려 깊은 배려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이 없이는 읽은 이들이 “유치호 일기”에 흐르는 역사의 물줄기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까닭이다. 1895년에 일어난 크고 중요한 사건을 들자면 을미사변과 춘생문 사건이다. 을미사변은 그해 10월 8일에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일본에서 불러온 낭인들을 이끌고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다.   일본인에 의해 자행된 이 천인공노할 국모시해에 흥선 대원군을 비롯한 몇 몇 조선 인사들이 가담한 것은 통탄할 노릇이며, 권력에 눈이 먼 이들은 국가와 민족이야 어찌되든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악행도 저지를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이 사건의 여파로 친일세력에 의해 감금상태가 된 고종황제를 구출하기 위한 친미파와 친러파와 개화파의 시도가 실패로 끝난 것이 11월 28일에 일어난 춘생문 사건이다. 윤치호 선생은 이 두 사건을 역사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대한제국의 위태한 상황을 우려하는 마음으로 주시하는 지도자의 입장에서 그의 일기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기에 공적이 문헌이나 역사의 기록에선 찾아보기 힘든 사건 발단의 징조와 사건의 발생과 전개,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한 전반적인 분위기를 “윤치호 일기”를 읽으며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언론이나 방송을 통해 공식적으로 보도된 사건이라도 그 뒤에 숨겨진 내막들을 알게 되면 사건의 본질과 진상을 소상이 파악할 수 있은 것처럼 말이다. 1895년에 쓴 “윤치호 일기” 속엔 당시의 대한제국 관리들의 나태함과 무능함과 그네들의 부패상, 그리고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표리부동한 처신을 일삼는 그들의 비겁하고 나약한 모습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처럼 한심한 관리들을 바라보는 윤치호 선생의 가슴에 찾아드는 나라를 향한 염려와 근심이 여기저기서 느껴지는가 하면, 고립되고 힘없는 대한제국을 집어삼키려는 주변국들의 음흉한 의도를 들여다보는 윤치호 선생의 비분강개한 심정도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다. 윤치호 선생이 10월 25일에 “조선 정부가 하는 일은 삼륜차와 같다. 하나는 조선 내각 요인이고, 또 하나는 일본 쪽 요인이고, 세 번째는 외국의 영향이다.”고 기록한 것은 그 당시 다른 나라들의 눈치를 보며 우왕좌왕하는 대한제국의 서글픈 실정을 직시하는 그의 슬픈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20대 젊은 나이에 상해에서 방황할 때 술 마시고, 기방출입을 일삼던 그가 어느 선교사의 인도로 기독교인이 된 후 다시는 곁길로 들어서지 않고 참된 예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도 1895년 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일기 중 “나의 사랑하는 아내”, “나의 아름다운 아내”, “나의 귀여운 아내”, “나의 어여쁜 아내”라는 표현들이 나온다. 철두철미 남존여비 사상에 젖어있던 그 당시 거물급의 대열에 우뚝 섰던 윤치호 선생이 오늘 날 젊은이들이 사랑을 속삭일 때 사용하는 다정하고 낭만적인 수식어들을 그의 아내 앞에 붙인 것을 보면 그는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이며, 강직하고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이면서도 다정다감한 마음을 지닌 분이였음을 알게 된다. 그 일기 속에는 역사적 문헌에선 찾아보기 힘든 그 당시 우리 선조들의 생활풍습들도 나타나 있으며, 나의 개인적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는 사실도 적혀 있는데 그것은 윤치호 선생이 서울에서 인천까지 가면서 인력거를 이용하셨다는 사실이다. 요즘은 승용차로 가면 30분이면 되고, 지하철을 타도 1시간 정도면 되는데 인력거를 타고 아침 9시에 서울을 떠나 오후 4시 인천에 도착하던 그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영어로 써진 “윤치호 일기” 제4권을 독자들이 흥미 있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역술하신 윤경남 여사의 탁월한 어학실력과 세련된 필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다른 언어로 써진 책을 필자의 의도가 선명하게 읽는 이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번역하는 일은 영혼을 옮기는 것처럼 힘든 일이다. 그런데도 “윤치호 일기 제4권에 나타난 역사의 흐름”의 진가가 들어날 수 있도록 역술하신 윤경남 여사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손영호 특별기고]  을미사변의 전말과 선각자로서의 한계

 2015-06-26 '윤치호 일기에 나타난 역사의 흐름' 출간에 부쳐’

가족 사진 - 좌로부터 손자 윤영선, 윤웅렬 장군, 장남 윤치호, 맏손녀 윤봉희

[필자주] 윤경남 씨가 지난해 윤치호 영문일기 제4권(1895~1896) 중 1896년 일기를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로 출간한 바 있다. 이번에 이어서 1895년 분을 역술(譯述), “윤치호 일기 제4권(1895년)에 나타난 역사의 흐름”이라는 타이틀로 출간하게 되었기에 부치는 글이다. 조선 말기와 청나라 말기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여인 천하'였다는 점이다. 1874년 대원군을 몰아내고 조선을 움직이다 1895년 10월 8일 급진개화파에게 고용된 일본인 낭인(浪人)들에 의해 44세 때 시해된 명성 황후(明成皇后, 1851~1895), 그리고 청 제국 말기인 1861년부터 1908년까지 50년 가까이 중국을 움직인 서태후(1835~1908)! 이 무렵 조선에는 1884년 '3일 천하'로 끝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났고, 중국에는 청나라 11대 황제 광서제(光緖帝, 1871~1908) 집권 때인 1898년 '100일 유신'으로 끝난 캉유웨이(康有爲)의 '무술변법 자강운동(戊戌變法自强運動)’이 일어났다. 모두가 민중 운동이 아닌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했으니, 완강한 보수 세력의 벽에 부딪혀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혁명이었으며, 조선이나 중국이 스스로 개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조선 말기 1882년(고종 19년, 청 광서 8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는 일본의 견제를 위해 청나라의 지원을 요청함으로써 위안스카이(袁世凱)가 23세의 나이로 조선에 부임하여 임오군란과 2년 뒤의 갑신정변을 진압한다. 이에 기세등등한 원세개는 아예 자신을 조선의 '총독'처럼 여기고 조선을 쥐고 흔들었던 인물이다.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 1865~1945)의 일기에도 "시골집 아산과 근방 마을에 청국 병정들이 가장 야만스런 방법으로 살인과 강탈과 겁탈을 일삼았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1894년 동학 농민운동(동학 혁명)을 계기로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은 청의 위안스카이라는 고리는 끊게 되지만 일본이라는 수갑을 차게 되는 꼴이 되어 버렸다. 을미년(1895)의 핵심적 사건은 명성황후(당시 민비)가 시해 당하는 비극적인 '을미사변(乙未事變)'과 친일세력들에게 감금당한 고종을 구해내려다 실패하는 '춘생문 사건(春生門事件)'으로 요약된다. 을미사변에 대한 좌옹 선생의 일기는 비장하다. "나는 이제 왕비마마가 일본 살인자들에게 잔인하게 살해 되셨음을 증명할 마지막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살인자들은 왕비의 사진을 손에 들고, 여인들을 모두 대조하며 조사했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너무나 끔찍하다!" 그는 폭로한다. "외부에서 일본 법무성에 여러통의 편지를 써 보냈는데, 일본은 최근에 조선 왕궁에서 일어난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 중에 중요한 편지 한 통이 있었는데, 그 피투성이 현장에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 군인들이었고, 그들이 살해한 것을 감추기 위해 일본옷으로 위장한 것이었다고 써보냈다"는 것이다.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놈들!

▲ 윤치호가 끔찍히도 사랑했던 부인 마시엔숭(1871~1905, 본명 馬秀珍). 슬하에 봉희, 영선, 광선, 용희 등 2남 2녀를 낳고 아깝게 요절했다.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서 명성황후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을 지목하였다.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츠카(石塚)가 사건의 전말을 눈치채지 못하게 할 의도로 자신을 그날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병하(鄭秉夏)를 가장 '죽일놈의 배신자'로 꼽았다. 그는 왕비의 은총을 받은 자로 왕비가 가장 신뢰하고 좋아하시던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왕비께서 왜놈들이 내실로 뛰어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뛰쳐 나왔다는데, 이때 정병하가 왕비를 안심시키며 거처로 다시 들어가게 함으로서 결국 시해 당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일기에서 "…조선과 일본 사이엔 어둡고 불신에 찬 강이 흐르고 건너지 못할 깊은 바다가 가로 놓여있다. 불신 그리고 조선 왕비의 피로 붉게 물든 오만함만이 남게 되었다."며 "일본과 친일파들은 그들의 목적에 합당한 것이라면, 어느 때라도 왕을 시해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註: 그는 나중에 고종 독살설을 확신했다.] 살인과 암살, 믿을 수 없는 배신행위의 본성을 가진 그들은, …지금쯤 저들이 꾸며낸 음모와 자랑스러운 성공을 축하하고 있으리라."고 분개하고 있다. 한편 김홍집•유길준 일파는 일본이 나라의 국모를 개처럼 죽였음에도 함구하고 오히려 ‘왕후’를 서인(庶人)으로 폐위하는 조서(詔書)를 꾸미고, 새 왕비 간택 조칙령을 내리는가 하면, 중국으로부터 독립함을 인식시키기 위해 '왕'의 칭호를 '황제'로 바꾸고 이윽고 상투 자르기를 진행한다. 이런 얼빠진 조선 정부의 행태는 학식도 없는 이문규라는 사람의 얘기만도 못하다. "…일본인들은 우리를 도와주려 한다고 말합니다만, 저들이 하는 짓은 우리에게 상처만 줍니다. 저들의 말씨와 행동이 일치하질 않거든요. 그 자들이 우리에게 상투를 자르게 하는 건, 그네들의 모자 가게와 양복점만 돈 벌게 해주기 위해서 랍니다…." 시해 당하기 일주일 전에 마지막으로 명성황후를 본 윤치호. "중전께서 내게 자애로운 모습을 보이실 때면 나는 언제나 그분의 위엄에 눌리곤 했지. 30년 동안의 바둑판같이 복잡한 치세기간에도 대원군, 박영효, 이노우에 같은 이들도 왕비를 당해 내지 못했다. 죽음만이 그분을 정복했다." 그러나 좌옹 선생은 명성황후가 억울한 피해자라는 시중의 여론에는 반대했다. 압력과 잔인함과 매수로 점철된 무능한 정권이었으며,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외세를 끌어들였고, 부패한 친정 일가들을 등용한 점과 무속인과 점술가들을 맹신해서 고위직을 내리는 등 국정의 문란을 초래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춘생문 사건은 을미사변 이후 김홍집 등 친일세력에 의해 감금되다시피한 고종 및 세자를 친러파, 친미파, 개화파 등에 의해 왕궁 밖으로 탈출시키고자 동년 11월 28일에 무력 충돌이 일어난 사건이다. 여기엔 언더우드 박사[註: 그는 왕비가 살아계시다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에비슨, 헐버트, 다이 등 미국선교사, 또 미국 공사 씰과 보좌관 알렌 박사와 러시아 공사 웨베르 등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또 당시 경무사(후에 군부대신) 윤웅렬(尹雄烈, 1840~1911, 윤치호의 부친)도 여기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중추원 의관 안경수가 변절하여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밀고하였고, 친위대 대장 이진호도 서리군부대신 어윤중에게 밀고하여 성공하지 못했으며, 이도철, 임최수 등 사건 관련자들은 대부분 역모죄로 처형당했고, 윤웅렬은 기적적으로 상하이(上海)로 도피했다가 아관파천 후에 귀국했다. [註: 결국 다음해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성사되면서, 그날 고종은 조칙을 내려 총리대신 김홍집, 내부대신 유길준,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군부대신 조희연을 '을미사적(乙未四賊)'이라고 밝혀 역도로 규정하고, 국모 재간택과 이미 내린 폐비(廢妃) 조칙을 무효로 돌렸다.]

▲ 1907년 사진 – 왼쪽은 윤치호(가운데, 당시 43세)의 모친 전주이씨, 오른쪽은  두번째 부인 백매려(白梅麗, 당시 18세). 남포 백씨는 3남 5녀를 낳았다.

좌옹 선생의 1895년 일기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당시 조선의 썪어빠진 정치와 외세에 빌붙는 외교, 처참한 경제와 가난에 찌든 민중 생활상 등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족, 특히 부인 마시엔숭(1871~1905)[註: 본명 마수진(馬秀珍), 마애방(馬愛芳•애퐁)은 여동생의 이름이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한편 그는 외세에 대해 '자국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으면 절대 도우지 않는다'며 자강론(自强論)과 민중 계몽을 위한 교육을 역설한다. 이는 청나라 때 "탈(脫)전통하여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근대적 민족주의"를 구축한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일본을 통해 개혁을 기대했던 그는 결국 조선 민중이 우매하기 때문에 실패했고, 그 잘못은 일본측이 아닌 조선 정부에 있으며, 따라서 못사는 것을 인과응보로 보았다. 우리는 윤치호의 1895년 일기를 통해서 19세기 청국이나 조선 말기의 시대상에서 최초의 근대인 또는 세계인이 부닥칠 수밖에 없는 현실적 한계와 선각자로서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그리하여 조선과 대청 제국의 20세기는 일본에 의해 비참하고 암울하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 단주(檀柱) 손 영 호   캐나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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