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물과 백두산 [이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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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학교교우칼럼2014.10.28 기사 발췌 -
뛰어난 언어감각과 전통 소재의 탁월한 활용으로 한국 시사(詩史)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미당(未堂) 서정주.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그러나 일제시대 친일행적으로 인해 업적이 폄하되기 일쑤다. 친일행적 시비와 관련해 미당은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
이를테면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 밑에서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로 체념하며 살아간 것”이라는 뜻이다. 이에 후세인들은 ‘반민족적 행위를 저질러놓고 하늘의 뜻에 따라 일제에 순응했다고 강변하는 것은 후안무치(厚顔無恥)한 행위’라고 힐난한다.
한국 근대사에서 일제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은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항하다 깨끗이 죽느냐, 일단 협력해서 살고보느냐… 그 중 후자는 자의든 타의든 후세에 의해 ‘친일파’로 분류됐고, 다른 업적이 아무리 뛰어나도 모든 것이 매도돼버린 것이 한국적 현실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한국인이라면 늘상 부르는 애국가. 이 애국가의 작사자 논란도 그렇다. 여러 사료(史料)상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인 것이 분명함에도 우리는 여전히 ‘작사자 미상(未詳)’의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좌 옹(佐翁) 윤치호(尹致昊, 1865∼1945), 한국 근대사 인물 중 그처럼 화려하고 다양한 경력을 지닌 사람도 드물다. 1880~90년대 미국 등에서 유학한 한국 근대사 최초의 지식인이었고,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 회장을 지낸 개화.자강운동의 핵심인물이었다. 한국 최초의 미국남감리회 신자이자 YMCA 운동 지도자로 일제강점기에는 기독교계의 최고 원로였다. 한국인 최초로 영어를 구사하고, 물려받은 재산이 넉넉해 이승만.안창호 등의 해외독립운동과 유망청년들의 유학자금을 도왔다. 학벌과 명망, 재력을 두루 갖춘 ‘귀족’이었으나 오히려 청교도적 인간형에 가까웠다. 이기적이고, 욕심 많고, 사치스럽고, 노동을 경시하는 사람을 경멸하고 근면, 성실, 신용, 절약 등 근대 시민윤리를 실천에 옮기려고 애썼다.
그의 거물다운 점이 또하나 있으니 바로 그의 (영문)일기다. 가끔 중단한 적도 있긴 하지만, 그는 18세인 1883년부터 장장 60년 동안 일기를 썼다. 일기에는 자신의 일상과 공인으로서의 활동은 물론, 국내외 정세에 대한 견해와 전망 등을 꼼꼼히 기록했다. 몸이 아플 때도, 여행을 다닐 때도 하루 일상을 일목요연하게 기록했다. 일기야말로 그의 분신이자 삶 자체였다.
그러나 그의 일기는 오랫동안 방치돼왔다. 그런 일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방대한 분량과 영문 독해의 부담 때문에 더 그랬다. 그런가 하면, 개인 일기를 사료로 볼 수 있느냐는 고정관념이나 윤치호가 ‘친일파’라는 선입견 때문에 가치를 폄하하는 사람도 많다. 만약 안창호, 김구, 신채호 등의 일기가 존재한다면 그렇게 방치돼 왔을까?
그의 모든 업적을 덮어버리며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낙인이 바로 ‘친일파’다. 그는 사실 3.1 운동 발발 초기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독립운동 무용론(無用論)’을 피력했고, 중일전쟁 후에는 기독교계의 친일을 주도하며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과 ‘조선임전보국단’ 등의 고위간부를 지내는 등 친일파 대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무조건 결과만 놓고 매도할 것이 아니라 속내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38년 이전까지는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다. 당시 흥업구락부 간부, 연희전문 교수, YMCA 간부들이 검거됐고 일본 검찰은 73세의 윤치호에게 협박과 협력을 강요했다. 모든 학교가 폐교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때부터 조선의 장래를 생각하며 일제에 저항할 것인지, 협력할 것인지, 처절한 고뇌가 이어진다. 그해 9월3일, 윤치호는 마침내 각서를 쓰고 일제에 협력하기로 서약한다.
그러나 현대사적 관점에서 윤치호를 재조명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것은 우리가 늘 부르는 애국가의 작사자가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여러 자료와 정황을 근거로 윤치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공인하려 했으나 심사위원 표결이 11대2 로 갈라져 채택하지 못했다. 찬성이 절대다수였음에도 만장일치가 아니라는 것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실제론 윤치호의 친일행적이 주 요인이었다.
최근 토론토에서는 윤치호 선생의 후손인 윤경남(본보 칼럼니스트)씨가 윤치호 영문일기 일부(1896년)를 번역한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 윤경남씨의 부군인 민석홍 장로는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윤치호 선생이 1938년 이후 일제에 협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도 큰 인물이기에 단편적인 설명만으론 부족하다. 그의 80년 생애 중 친일을 강요당하기 전의 업적을 조명해서 평가해야 한다.”
우리의 국가(國歌)인 애국가를 아직도 ‘작사자 미상’으로 남겨둔 채 내년에 광복 70년을 맞으니 안타깝다. 명백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것은 득될 게 없다. 한 인간의 행적을 비판하기는 쉬워도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의 고뇌도 한번쯤 헤아려 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우리는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와 작사자인 윤치호 두 사람 모두 친일파로 규정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고 있다. 독립선언문을 쓴 최남선도 마찬가지다. 무언가 이상하고 참담하지 않은가… 한참 뒤 우리 시대를 평가할 때 친미파•친북파라 낙인 찍으면 당사자는 당황할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고는 모른다.”(소설가 조성기)
이용우 사장, 토론토한인뉴스부동산캐나다, 2014.10.28
[이용우] 동해물과 백두산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서정주의 ‘자화상’)뛰어난 언어감각과 전통 소재의 탁월한 활용으로 한국 시사(詩史)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미당(未堂) 서정주.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그러나 일제시대 친일행적으로 인해 업적이 폄하되기 일쑤다. 친일행적 시비와 관련해 미당은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
이를테면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 밑에서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로 체념하며 살아간 것”이라는 뜻이다. 이에 후세인들은 ‘반민족적 행위를 저질러놓고 하늘의 뜻에 따라 일제에 순응했다고 강변하는 것은 후안무치(厚顔無恥)한 행위’라고 힐난한다.
한국 근대사에서 일제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은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항하다 깨끗이 죽느냐, 일단 협력해서 살고보느냐… 그 중 후자는 자의든 타의든 후세에 의해 ‘친일파’로 분류됐고, 다른 업적이 아무리 뛰어나도 모든 것이 매도돼버린 것이 한국적 현실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한국인이라면 늘상 부르는 애국가. 이 애국가의 작사자 논란도 그렇다. 여러 사료(史料)상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인 것이 분명함에도 우리는 여전히 ‘작사자 미상(未詳)’의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좌 옹(佐翁) 윤치호(尹致昊, 1865∼1945), 한국 근대사 인물 중 그처럼 화려하고 다양한 경력을 지닌 사람도 드물다. 1880~90년대 미국 등에서 유학한 한국 근대사 최초의 지식인이었고,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 회장을 지낸 개화.자강운동의 핵심인물이었다. 한국 최초의 미국남감리회 신자이자 YMCA 운동 지도자로 일제강점기에는 기독교계의 최고 원로였다. 한국인 최초로 영어를 구사하고, 물려받은 재산이 넉넉해 이승만.안창호 등의 해외독립운동과 유망청년들의 유학자금을 도왔다. 학벌과 명망, 재력을 두루 갖춘 ‘귀족’이었으나 오히려 청교도적 인간형에 가까웠다. 이기적이고, 욕심 많고, 사치스럽고, 노동을 경시하는 사람을 경멸하고 근면, 성실, 신용, 절약 등 근대 시민윤리를 실천에 옮기려고 애썼다.
그의 거물다운 점이 또하나 있으니 바로 그의 (영문)일기다. 가끔 중단한 적도 있긴 하지만, 그는 18세인 1883년부터 장장 60년 동안 일기를 썼다. 일기에는 자신의 일상과 공인으로서의 활동은 물론, 국내외 정세에 대한 견해와 전망 등을 꼼꼼히 기록했다. 몸이 아플 때도, 여행을 다닐 때도 하루 일상을 일목요연하게 기록했다. 일기야말로 그의 분신이자 삶 자체였다.
그러나 그의 일기는 오랫동안 방치돼왔다. 그런 일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방대한 분량과 영문 독해의 부담 때문에 더 그랬다. 그런가 하면, 개인 일기를 사료로 볼 수 있느냐는 고정관념이나 윤치호가 ‘친일파’라는 선입견 때문에 가치를 폄하하는 사람도 많다. 만약 안창호, 김구, 신채호 등의 일기가 존재한다면 그렇게 방치돼 왔을까?
그의 모든 업적을 덮어버리며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낙인이 바로 ‘친일파’다. 그는 사실 3.1 운동 발발 초기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독립운동 무용론(無用論)’을 피력했고, 중일전쟁 후에는 기독교계의 친일을 주도하며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과 ‘조선임전보국단’ 등의 고위간부를 지내는 등 친일파 대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무조건 결과만 놓고 매도할 것이 아니라 속내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38년 이전까지는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다. 당시 흥업구락부 간부, 연희전문 교수, YMCA 간부들이 검거됐고 일본 검찰은 73세의 윤치호에게 협박과 협력을 강요했다. 모든 학교가 폐교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때부터 조선의 장래를 생각하며 일제에 저항할 것인지, 협력할 것인지, 처절한 고뇌가 이어진다. 그해 9월3일, 윤치호는 마침내 각서를 쓰고 일제에 협력하기로 서약한다.
그러나 현대사적 관점에서 윤치호를 재조명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것은 우리가 늘 부르는 애국가의 작사자가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여러 자료와 정황을 근거로 윤치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공인하려 했으나 심사위원 표결이 11대2 로 갈라져 채택하지 못했다. 찬성이 절대다수였음에도 만장일치가 아니라는 것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실제론 윤치호의 친일행적이 주 요인이었다.
최근 토론토에서는 윤치호 선생의 후손인 윤경남(본보 칼럼니스트)씨가 윤치호 영문일기 일부(1896년)를 번역한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 윤경남씨의 부군인 민석홍 장로는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윤치호 선생이 1938년 이후 일제에 협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도 큰 인물이기에 단편적인 설명만으론 부족하다. 그의 80년 생애 중 친일을 강요당하기 전의 업적을 조명해서 평가해야 한다.”
우리의 국가(國歌)인 애국가를 아직도 ‘작사자 미상’으로 남겨둔 채 내년에 광복 70년을 맞으니 안타깝다. 명백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것은 득될 게 없다. 한 인간의 행적을 비판하기는 쉬워도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의 고뇌도 한번쯤 헤아려 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우리는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와 작사자인 윤치호 두 사람 모두 친일파로 규정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고 있다. 독립선언문을 쓴 최남선도 마찬가지다. 무언가 이상하고 참담하지 않은가… 한참 뒤 우리 시대를 평가할 때 친미파•친북파라 낙인 찍으면 당사자는 당황할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고는 모른다.”(소설가 조성기)
이용우 사장, 토론토한인뉴스부동산캐나다, 201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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