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알마교회의 제임스 게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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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스의 지구촌 여행89
캐나다 알마교회의 제임스 게일목사
윤 경 남
작은 종탑이 있는 St.Andrew Alma Presb.Church
토론토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 제임스 스캇 게일(1863-1937)이 토론토대학 YMCA후원으로 125년 전에 캐나다 최초의 한국선교사로 파송된다. 그는 “한 아름 안고 왔던 젊음을 조선 땅에 다 부리고, 노구를 이끌고 모토의 청구를 무덤처럼 찾아갈 뿐이었으며, 40 여 성상을 조선 사람과 같이 웃고 울었다”고, 그의 회고록에 썼다.
그 <착한 목자>의 삶과 선교 이야기를 토론토 대학의 유영식 교수님이 자그만치 1천 페이지에 가까운 책으로 두 권이나 펴냈다. 장신대의 임희국 교수는 그 책을 “게일연구의 결정판”으로 칭송했고, 부산 장신대의 탁지일 교수는 “세계 곳곳에 흩어진 게일 관련 자료와 유품들이 유교수를 찾아오는 이유는 유교수의 게일 사랑때문”이라고 서평을 썼다. 그렇게 찾아온 유물 중에 게일이 쓰던 책상이 현재 유교수님 댁 서재에 있다. 그 책상 앞에서 유교수는 게일의 화신인 양 <착한 목자> 이야기를 쓴 것. 민석홍장로와 나는 유교수님 댁을 방문하여 그 책을 받아오며 옛날 호두나무책상을 두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성령의 힘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없는 진기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면서. 유교수님의 작업이 성공하도록 영적충전을 해오신 사모님의 모습이 전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보였다.
게일은 교회 업적도 크지만 문학사적인 공이 더 크다. 그가 한글로 번역한 존 번연의 소설 <텬로력정>은 우리나라 영문학 번역의 효시이다. 뿐만 아니라 1925년에 <신역 신구약전서>를 번역했다. 그러나 번역 원칙에 대한 의견 차이로 성서공회에서 출판하지 못하고, 윤치호의 후원으로 기독교창문사에서 출판했다.
게일선교사파송1백20주년기념예배에 참석한 게일선교사의 후손들
중 앙YMCA초대회장이었던 게일은 윤치호를 제2대 회장으로 추대했다. 윤치호는1896년 니콜라이2세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민영환의 수원(隨員)으로 러시아에 다녀온 다음에, 서재필 박사에 이어 독립협회장을 지내고 만민공동회 회장을 맡았다. 그는 조선의 민주화를 위한 만민공동회 연설에 모인청년들의 역량을 믿고 노비제도와 신분제도의 철폐, 적서 차별과 남녀 차별 철폐, 민중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홍보를 추진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정의 독립협회 탄압과 민중들의 배신에 이어 고종은 윤치호를 없애려고 자객을 보낸다. 그날 밤중에 현명한 마부인의 기지로 뒷 담을 뛰어넘어 알렌공사집으로 몸을 숨긴다.
그후, 추방과 다름없는 덕원감리와 삼화감리로 좌천되었으나 오랜만의 한적한 생활은 오히려 마부인과 조용하고 행복한 시간을 갖게해준다. 그나마도 오래 누리진 못했지만. 그가 덕원감리사로 있을때, 게일이 살던 원산의 봉수대를 방문하여 게일의 부인과 장모를 만난 기쁨을 그의 일기에 적기도 했다.
다시 외부협판에 복직하고 을사조약의 어려운 고비를 넘긴 윤치호는 외부협판을 비롯한 모든 관직을 버리고, 교회와 사회운동에 전념한다. 조선이 독립하려면 젊은이들에게 교육과 그리스도의 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삶의 목표였다.
3.1.독립만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는중앙YMCA 회장 이었다. 그는3.1.운동에 참여하지 않아 많은 오해와 지탄을 받았으나, 윤치호일기(1916-1943)를 부분 번역한 서울대학 김상태 교수는 주석 페이지에 이렇게 적었 다.
“학계 일각에서는 윤치호가 일제의 외압이나 사주에 의해 3.1.운동을 반대했던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일기 내용을 통해, 그가 자신의 일관된 정세인식에 따라 3.1.운동을 반대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3.1 운동에 참가하지 않는 자신의 입장을 신문에 분명하게 발표하고 그의 일기에도 적었다.
유영식교수-유재신목사-임태호회장-소창길목사
1919.3.1. 토요일 “낮 1시 30분 경. 거리 쪽에서 군중의 함성이 들려왔다. 거리를 가득 메운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종로 광장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우리 눈에 들어왔다. 소년들은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었다. 이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돌았다.”
1919.3.5. 수요일 “… 게일박사를 방문해, 일본인들이 외국인의 간섭에 매우 예민한 만큼 당국자들에게 이번 사태의 해결을 요구하는 조선인들의 이름을 발설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게일 박사는 일본이 지난 10년 동안 조선인들의 호감을 사는 데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기 때문인지 조선인들에게 다소 동조하는 것 같았다.”
1919.3.19.수요일 “경찰 수사관들이 죄수들, 특히 여학생들에게 온갖 종류의 야만적인 행위를 저질렀다고 한다…난 이 고통을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걸 잘 알고있다. 그들의 고통에 대한 상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조 선인들 사이에 나에 대한 비난 여론이 최고조에 달해있다. 난 분명히 오해를 받고 있다… 여론은 옳고 그르건 간에 사람들의 삶을 주조하는 데 법이나 종교, 이성이나 칼보다 강하다. 무엇이 중국 여인들로하여금 전족을 하게 했나? 바로 여론이었다. 무엇이 사악한 사람들로 하여금 버젓이 살 수있도록 해주었나? 바로 여론이었다.”
1919.5.24.”사촌동생 치소의 부탁으로 오전에 게일 박사를 찾아갔다. 치소가 현재 상하이에서 공부하고 있는 자기 아들 보선에게 돈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게일박사에게 물어봐달라고 한 것이다. 게일 박사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는 지금껏 일본인들은 용감한 데 반해 조선인들은 겁쟁이들이라고 생각해왔다면서, 이번 사태를 계기로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1919.4.20. “ 난 이번 독립운동에 참가한 학생들과 기독교 목사 대부분이 길을 잘못 들긴 했지만, 그래도 정직한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다. .. 그러나 손병희, 오세창 같은 천도교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번 소요에 참가했다고 생각한다. (1) 가난하고 무지한 신도들로부터 수백만 원을 사취한, 몹시 비열한 행위를 감추기 위해서.
(2)이름을 날린 후 영예와 명성을 등에 업고 감옥에서 나와 신도들로부터 더 많은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 수십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손병희 같은 사기꾼들에게 다년간에 걸쳐 농락을 당해왔다는 것이야말로, 조선민족이 아직 독립국으로서의 생존을 향유할 만한 지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없다.”
지난 2008년에 우리부부는 온타리오 주, 알마에 있는 세인트앤드루 장로교회에서 열린 게일목사 선교12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했다. 호박돌을 얼기설기 쌓아 올린 예배당 외벽과 붉은 기와지붕 위에서 종소리가 울릴 것만 같은 아담한 종각을 올려다보며 교회 안에 들어섰다. 이미 기념 예배는 끝나고 강단 위에 여러사람이 올라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 다.
나도 한장 찍어야지, 하면서 카메라를 드는데, "윤권사님, 민장로님, 이리로 올라오세요."하고 누군가 우리를 부른다.
이 모임을 주관한 토론토 필그림 장로교회 소창길 목사님이 유영식교수, 유재신목사,박재훈목사, 강신봉회장, 임태호회장, 영국에서 온 게일목사의 외손자녀들과 사진을 찍으려고 서 있다가 우리를 보고 손짓한 것이다. 우리도 급히 강단 위로 올라가 귀한 장로교 역사의 자리에 기쁘게 한자리했다.
1백20년 전 1888년 4월, 캐나다 최초로 한국 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린 이 장소에서, 유영식 교수는 게일의 업적을 기리는라는 게일박사 기념 화집을 출간 봉헌했다.
유 교수가 직접 알마에 있는 게일의 생가와 영국의 바스, 게일이 선교사역을 했던 조선의 서울, 금강산, 평양,원산 등을 어렵게 방문해서 수집한 사료 및 후손들로부터 기증받은 자료 등을 한데 엮은 역사 자료서 이다.
연동교회 초대목사인 게일박사가 1907년에 스위스에서 식구들을 데리고 일년만에 다시 연동교회로 돌아왔을 때 고찬익 장로가 지은 환영가는 정말 눈물겹다. 1절 '오늘 모혀 깃버함은 긔목사를 환영함/ 우리쥬의 본을 밧아 사랑마암 표하세/ 편히 단녀왓스니/ 주의 은혜 감샤하야 깃븐찬미 합시다.’ 4절 ‘아바지께 다시나와 기도하고 바랄것/ 긔목사와 온교회에 성신충만합쇼셔/거룩하고 깨긋한 마암 예수갓게 합쇼셔/영원무궁 보좌압혜 편히쉬게 합쇼셔.'
교회에서 가까운 엘로라 공원에 준비된 바베큐를 모두 맛있게 들면서, 게일목사의 외손녀인 로즈마리 힐에게 이 노래를 아느냐고 물으니, 베토벤 제 9번교향곡의 '기뻐하라 찬미하라'는 합창곡을 허밍으로 불러준다.
게일과 윤치호는 오랜 기간을 함께 지낸 친구지간이다. 게일은 최초로 조선에 온 캐나다 사람이며, 윤치호는 최초로 캐나다를 방문한 조선사람이다.
이번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유교수님의 <착한목자:게일의 삶과 선교> 출판감사 행사가 있기에 두 사람의 우정이 떠올랐다.
발행일 : 2014.06.25
캐나다 알마교회의 제임스 게일목사
윤 경 남
작은 종탑이 있는 St.Andrew Alma Presb.Church
토론토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 제임스 스캇 게일(1863-1937)이 토론토대학 YMCA후원으로 125년 전에 캐나다 최초의 한국선교사로 파송된다. 그는 “한 아름 안고 왔던 젊음을 조선 땅에 다 부리고, 노구를 이끌고 모토의 청구를 무덤처럼 찾아갈 뿐이었으며, 40 여 성상을 조선 사람과 같이 웃고 울었다”고, 그의 회고록에 썼다.
그 <착한 목자>의 삶과 선교 이야기를 토론토 대학의 유영식 교수님이 자그만치 1천 페이지에 가까운 책으로 두 권이나 펴냈다. 장신대의 임희국 교수는 그 책을 “게일연구의 결정판”으로 칭송했고, 부산 장신대의 탁지일 교수는 “세계 곳곳에 흩어진 게일 관련 자료와 유품들이 유교수를 찾아오는 이유는 유교수의 게일 사랑때문”이라고 서평을 썼다. 그렇게 찾아온 유물 중에 게일이 쓰던 책상이 현재 유교수님 댁 서재에 있다. 그 책상 앞에서 유교수는 게일의 화신인 양 <착한 목자> 이야기를 쓴 것. 민석홍장로와 나는 유교수님 댁을 방문하여 그 책을 받아오며 옛날 호두나무책상을 두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성령의 힘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없는 진기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면서. 유교수님의 작업이 성공하도록 영적충전을 해오신 사모님의 모습이 전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보였다.
게일은 교회 업적도 크지만 문학사적인 공이 더 크다. 그가 한글로 번역한 존 번연의 소설 <텬로력정>은 우리나라 영문학 번역의 효시이다. 뿐만 아니라 1925년에 <신역 신구약전서>를 번역했다. 그러나 번역 원칙에 대한 의견 차이로 성서공회에서 출판하지 못하고, 윤치호의 후원으로 기독교창문사에서 출판했다.
게일선교사파송1백20주년기념예배에 참석한 게일선교사의 후손들
중 앙YMCA초대회장이었던 게일은 윤치호를 제2대 회장으로 추대했다. 윤치호는1896년 니콜라이2세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민영환의 수원(隨員)으로 러시아에 다녀온 다음에, 서재필 박사에 이어 독립협회장을 지내고 만민공동회 회장을 맡았다. 그는 조선의 민주화를 위한 만민공동회 연설에 모인청년들의 역량을 믿고 노비제도와 신분제도의 철폐, 적서 차별과 남녀 차별 철폐, 민중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홍보를 추진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정의 독립협회 탄압과 민중들의 배신에 이어 고종은 윤치호를 없애려고 자객을 보낸다. 그날 밤중에 현명한 마부인의 기지로 뒷 담을 뛰어넘어 알렌공사집으로 몸을 숨긴다.
그후, 추방과 다름없는 덕원감리와 삼화감리로 좌천되었으나 오랜만의 한적한 생활은 오히려 마부인과 조용하고 행복한 시간을 갖게해준다. 그나마도 오래 누리진 못했지만. 그가 덕원감리사로 있을때, 게일이 살던 원산의 봉수대를 방문하여 게일의 부인과 장모를 만난 기쁨을 그의 일기에 적기도 했다.
다시 외부협판에 복직하고 을사조약의 어려운 고비를 넘긴 윤치호는 외부협판을 비롯한 모든 관직을 버리고, 교회와 사회운동에 전념한다. 조선이 독립하려면 젊은이들에게 교육과 그리스도의 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삶의 목표였다.
3.1.독립만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는중앙YMCA 회장 이었다. 그는3.1.운동에 참여하지 않아 많은 오해와 지탄을 받았으나, 윤치호일기(1916-1943)를 부분 번역한 서울대학 김상태 교수는 주석 페이지에 이렇게 적었 다.
“학계 일각에서는 윤치호가 일제의 외압이나 사주에 의해 3.1.운동을 반대했던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일기 내용을 통해, 그가 자신의 일관된 정세인식에 따라 3.1.운동을 반대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3.1 운동에 참가하지 않는 자신의 입장을 신문에 분명하게 발표하고 그의 일기에도 적었다.
유영식교수-유재신목사-임태호회장-소창길목사
1919.3.1. 토요일 “낮 1시 30분 경. 거리 쪽에서 군중의 함성이 들려왔다. 거리를 가득 메운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종로 광장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우리 눈에 들어왔다. 소년들은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었다. 이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돌았다.”
1919.3.5. 수요일 “… 게일박사를 방문해, 일본인들이 외국인의 간섭에 매우 예민한 만큼 당국자들에게 이번 사태의 해결을 요구하는 조선인들의 이름을 발설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게일 박사는 일본이 지난 10년 동안 조선인들의 호감을 사는 데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기 때문인지 조선인들에게 다소 동조하는 것 같았다.”
1919.3.19.수요일 “경찰 수사관들이 죄수들, 특히 여학생들에게 온갖 종류의 야만적인 행위를 저질렀다고 한다…난 이 고통을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걸 잘 알고있다. 그들의 고통에 대한 상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조 선인들 사이에 나에 대한 비난 여론이 최고조에 달해있다. 난 분명히 오해를 받고 있다… 여론은 옳고 그르건 간에 사람들의 삶을 주조하는 데 법이나 종교, 이성이나 칼보다 강하다. 무엇이 중국 여인들로하여금 전족을 하게 했나? 바로 여론이었다. 무엇이 사악한 사람들로 하여금 버젓이 살 수있도록 해주었나? 바로 여론이었다.”
1919.5.24.”사촌동생 치소의 부탁으로 오전에 게일 박사를 찾아갔다. 치소가 현재 상하이에서 공부하고 있는 자기 아들 보선에게 돈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게일박사에게 물어봐달라고 한 것이다. 게일 박사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는 지금껏 일본인들은 용감한 데 반해 조선인들은 겁쟁이들이라고 생각해왔다면서, 이번 사태를 계기로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1919.4.20. “ 난 이번 독립운동에 참가한 학생들과 기독교 목사 대부분이 길을 잘못 들긴 했지만, 그래도 정직한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다. .. 그러나 손병희, 오세창 같은 천도교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번 소요에 참가했다고 생각한다. (1) 가난하고 무지한 신도들로부터 수백만 원을 사취한, 몹시 비열한 행위를 감추기 위해서.
(2)이름을 날린 후 영예와 명성을 등에 업고 감옥에서 나와 신도들로부터 더 많은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 수십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손병희 같은 사기꾼들에게 다년간에 걸쳐 농락을 당해왔다는 것이야말로, 조선민족이 아직 독립국으로서의 생존을 향유할 만한 지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없다.”
지난 2008년에 우리부부는 온타리오 주, 알마에 있는 세인트앤드루 장로교회에서 열린 게일목사 선교12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했다. 호박돌을 얼기설기 쌓아 올린 예배당 외벽과 붉은 기와지붕 위에서 종소리가 울릴 것만 같은 아담한 종각을 올려다보며 교회 안에 들어섰다. 이미 기념 예배는 끝나고 강단 위에 여러사람이 올라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 다.
나도 한장 찍어야지, 하면서 카메라를 드는데, "윤권사님, 민장로님, 이리로 올라오세요."하고 누군가 우리를 부른다.
이 모임을 주관한 토론토 필그림 장로교회 소창길 목사님이 유영식교수, 유재신목사,박재훈목사, 강신봉회장, 임태호회장, 영국에서 온 게일목사의 외손자녀들과 사진을 찍으려고 서 있다가 우리를 보고 손짓한 것이다. 우리도 급히 강단 위로 올라가 귀한 장로교 역사의 자리에 기쁘게 한자리했다.
1백20년 전 1888년 4월, 캐나다 최초로 한국 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린 이 장소에서, 유영식 교수는 게일의 업적을 기리는
유 교수가 직접 알마에 있는 게일의 생가와 영국의 바스, 게일이 선교사역을 했던 조선의 서울, 금강산, 평양,원산 등을 어렵게 방문해서 수집한 사료 및 후손들로부터 기증받은 자료 등을 한데 엮은 역사 자료서 이다.
연동교회 초대목사인 게일박사가 1907년에 스위스에서 식구들을 데리고 일년만에 다시 연동교회로 돌아왔을 때 고찬익 장로가 지은 환영가는 정말 눈물겹다. 1절 '오늘 모혀 깃버함은 긔목사를 환영함/ 우리쥬의 본을 밧아 사랑마암 표하세/ 편히 단녀왓스니/ 주의 은혜 감샤하야 깃븐찬미 합시다.’ 4절 ‘아바지께 다시나와 기도하고 바랄것/ 긔목사와 온교회에 성신충만합쇼셔/거룩하고 깨긋한 마암 예수갓게 합쇼셔/영원무궁 보좌압혜 편히쉬게 합쇼셔.'
교회에서 가까운 엘로라 공원에 준비된 바베큐를 모두 맛있게 들면서, 게일목사의 외손녀인 로즈마리 힐에게 이 노래를 아느냐고 물으니, 베토벤 제 9번교향곡의 '기뻐하라 찬미하라'는 합창곡을 허밍으로 불러준다.
게일과 윤치호는 오랜 기간을 함께 지낸 친구지간이다. 게일은 최초로 조선에 온 캐나다 사람이며, 윤치호는 최초로 캐나다를 방문한 조선사람이다.
이번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유교수님의 <착한목자:게일의 삶과 선교> 출판감사 행사가 있기에 두 사람의 우정이 떠올랐다.
발행일 : 201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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